죽음을 마주하다.

잘 살기 위해서

by 김재용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비둘기들과 참새들이 빵 부스러기를 먹고 있었다. 누가 일부러 준 것인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꽤 많은 양의 빵이 떨어져 있었고 새들은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참새 두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가 도로 위로 나왔다. 평소에 차들이 많이 다니는 곳은 아닌데, 그래서였을까? 승용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쌩 지나갔다. 참새 한 마리가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눈도 감지 못했다. "읍". 그리고 정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태.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 쿵쾅대던 심장이, 가빴던 숨이, 얼어붙었던 근육이, 복잡했던 머리가 죽음을 마주하기 전으로 돌아왔다. 그냥 멍하니 죽은 참새를 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참새 위로 몇 번이고 차들이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왜 유독 그 참새가 죽음을 마주한 것에 충격이었을까? 활어가 회가 되는 모습에서도 죽음을 마주하고, 물을 과하게 줬기에 시들어 가는 식물에서도 죽음을 마주하고, 한 여름 윙윙거리는 모기를 전기 파리채로 잡았을 때도 죽음을 마주한다. 같은 생명이고, 죽음인데 왜 오늘 마주한 죽음만이 심장을 뛰게 하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까? 나와 친밀한 감정을 나눴던 생명들도 아닌데.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삶 속에는 죽음이 늘 도처에 있었다. 단지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꺼려했을 뿐. 나와 내 주변의 죽음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죽는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사회 속에 살아가기 위해 통용되는 언어를 배우듯, 노후를 위해 적금이나 재테크를 통해 돈을 모아두듯, 죽음 또한 우리 인생의 과업 중에 하나다.


죽음은 단순한 결과일 뿐, 절대적 목표는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준비를 통해 맞는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 좋은 죽음이어야 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하루를 충실히 살다 잠이 들었는데, 고통 없이 잠에서 깨지 않는 것.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너무 급하다. 좋은 죽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참새도 빵을 먹고 배를 채운 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죽었다. 그 주변에는 죽은 참새를 위해 울어줄 그 누구도 없었다. 반대로 서서히 죽음을 준비한다면 좋은 죽음일 수 있을까? 질병으로 꾸준히 죽어가는 방법이 있다. 죽음은 계속해서 준비를 하겠지만, 삶이 무너질 것이다.


좋은 죽음을 마주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잘 살아가기 위함이다. 죽음을 명확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죽음까지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다. 죽음에 대해 고민할수록, 살아가는 시간의 밀도가 높아진다. 죽음을 준비할수록, 주변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역설이다.


좋은 죽음은 질병 또는 속도와 같은 변수가 큰 영향을 주지 못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나를 위해 눈물 흘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죽음이다. '누군가'에는 나와 가까운 사람뿐 아니라, 나와 함께 지내는 동물, 내가 열정을 바쳐 하는 일, 그토록 변화를 바랐던 더 나은 사회도 될 수 있다. 내 삶의 끝에서 그 '누군가'가 슬퍼해주기를 바라며 죽음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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