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비록 집 방바닥에 앉아 할인할 때 산 돼지고기와 냉동실에 뒹굴던 해물을 넣어 만든 볶음 우동을 먹었지만, 우리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음식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보면서 낄낄대며 실없는 장난과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았던 친구는 이제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있었다.
나이가 드는 과정일까? 아니면 소중한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서였을까? 이유 없이 친구끼리 즐겨했던 비난도, 이유가 있는 비판도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삼켰다. 만약 그 이야기를 뱉었다면 아마 서로 얼굴을 붉히고 헐뜯었을 테다. 이내 술을 마시면서 풀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나갔겠지만 애초부터 그러지 않았다.
말을 삼키는 내 모습에 놀랐고, 삼켜서 아무런 감정 소모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상황에 놀랐고, 다시 곱씹어 소화하며 글을 쓰고 있는 과정에 놀란다. 그동안 친구와의 대화에서 불화와 불편함은 다 내 탓이었던가? 말을 삼키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아서 찝찝했지만, 다툼 없이 지나간 상황에 뿌듯했다.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와 불편을 마음에 담아둬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도,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다니면서도, 맥주 한 캔을 사러 편의점에 가서도 종종 말을 삼켜야 할 때가 온다. "항상"은 아니지만 해야 할 때를 알고, 하지 않아야 할 때 참을 수 있는 판단력. 그 판단력이 나에게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옳다 생각하는 것을 상황이나 대상과 관계없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정의라 믿었다.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저 말을 삼키는 것. 말을 삼킨 대가로 서로 마음 상하는 일 없이 유튜브를 웃으면서 보고,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