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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Oct 09. 2022

사랑에 대한 단상(feat. 작은 아씨들)

사랑은 맹목적이어야 하는가?

《작은 아씨들》은 가난하지만 우애 있게 자란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맞서는 이야기다. 드라마 대립 구조 중 저번에는 드라마의 핵심 대립 상태인 '가난'과 '부유'에 대해 썼다면, 이번에는 드라마 속 사랑의 대립에 대한 생각을 써보려고 한다.


극 중의 '가난한 존재'들과 '부유한 존재'들은 존재를 사랑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다르다. '가난한 존재'들은 존재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이를테면 막내를 향한 언니들의 사랑, 자매의 죽음 앞에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 자신이 약점이 될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식의 안전을 위해 혀를 깨물어 버리는 어머니의 사랑 등 표현되는 사랑의 방식은 다르지만 무조건적이며 맹목적인 사랑을 나눈다.

작은 아씨들 일러스트

반면 '부유한 존재'들은 상대가 처한 상황, 조건, 사랑함에 따른 반사 이익 등 다양한 이유에 따라 존재를 사랑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딸에게 도움 되는 존재로써 사랑하거나, 자신이 설계한 연극 캐릭터로써 사랑하거나, 자신의 손발이 되어 행동하는 병졸로써 사랑한다. 그들의 사랑에는 이유나 목적이 항시 따른다.


극 중 표현되는 사랑의 방식으로 보아 사랑은 맹목적일 수도 있고, 조건적일 수도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사랑이 필요할까?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다. 상대를 귀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인 '사랑'에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이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데, 만약 이유 있는 사랑이 가능하다면 존재에 대한 사랑보다는 이유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해?


나도 연애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았고, 드라마나 콘텐츠에서도 패러디로 사용되곤 한다. 즉,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러나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 생각한다. 사랑에는 이유가 필요치 않으니, 질문의 본질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확인이 목적이지만, '왜'를 물음으로써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게 되어 그 본질을 알 수 없게 된다.


만약 상대를 사랑함에 이유나 조건이 있을 수 있다 가정하더라도, 그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 사랑하지 않는 존재가 돼버린다. 따라서 조건적 사랑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를테면 조건적 사랑의 경우 사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끝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만남으로 인한 설렘과 호기심으로 콩깍지가 씌어 상대의 단점은 보지 못한다. 상대의 단점은 처음부터 존재했음에도, 설렘과 호기심으로 가려졌던 단점이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 드러난다. 상대도 변하지 않았고, 나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변한 것은 호기심과 설렘뿐이지만, 상대가 변했다 느끼기 쉽다. 이유 있는 사랑이었기에 그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 사랑의 이유 또한 사라진다. 그렇게 조건적 사랑은 끝난다.


사랑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상대이기에 사랑해야 한다.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다. 극 중 '가난한 존재'들은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결말이 공개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아마 이들의 사랑은 '부유한 존재'들과의 대립에서 승리할 것이다. 클리셰적일 수도 있지만, 단단하고도 숭고한 맹목적인 사랑은 가변적인 조건적 사랑에 질 수 없고, 져서도 안 된다. 우리 사회에는 혐오가 만연해 있다. 소위 '남자라서, 여자라서, 기득권이라서'와 같은 조건적 사랑이 아닌 그저 '사람이라서'와 같은 맹목적인 사랑만이 혐오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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