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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Nov 02. 2022

집중 좀 못하면 어때

늦은 저녁 길을 걷는데, 요즘은 사라져 흔히 볼 수 없는 육교가 있었다. 어두운 밤 육교 아래는 더 깜깜했는데, 한 커플이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차량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이었지만, 내가 직접 옆을 지나갔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계속 사랑을 나눴다. 어두운 장소에서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커플은 사랑을 나누는 순간의 호흡에, 서로의 온기에, 맞닿은 상대의 입술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집중하면 주위의 소리도, 시야도, 냄새도 차단한 채 온전히 행위에만 몰두한다. 그 농도와 지속시간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농도가 짙은 몰두의 경험은 일상생활에서 종종 마주하곤 한다.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음악을 들으면, 어느 순간 음악 소리는 사라지고 멍한 것 같은 기분에서 깰 때가 있다. 그때 시계를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집중의 시간에서 깨어나면 왠지 모르게 뿌듯한 감정을 느끼고는 한다. 밀도 있게 시간을 사용했다는 만족감, 무언가에 그토록 빠져 일하고 있다는 자아 도취감, 자신이 집중력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감. 집중의 시간 뒤에 찾아오는 감정들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왜곡된 결과는 아닐까? 과연 집중은 긍정적인 행위일까? 오히려 집중하지 못함에 손뼉 치는 사회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사회구조나 생활하는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변화된 사회에서는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한 사회로 바뀌었기에, '집중'이라는 행위가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 불안 등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감정뿐 아니라, 표출된 감정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행동도 그렇다.


야생 상태에서 인간은 애초에 집중하지 않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시각뿐 아니라 촉각, 후각 등의 다양한 정보에 대해 빠르게 판단하고 도망가야 했다. 반면 무언가에 몰두했던 인간은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후손이다.

각종 포털사이트에 '집중' 또는 '집중력'이라는 것을 검색하면, '집중력 장애' 또는 '집중력 향상 방법' 등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집중을 못하면 낙오자로 구분되는 듯하고, 갖은 방법을 통해 집중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집중'이라는 능력은 인간을 마치 기계처럼 판단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기계는 항상 집중해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학습으로 집중 유지시간을 길게 만들어 보다 효율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써 전락하는 듯하다.


기계냐, 인간이냐?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 여기고서 기계 파괴 운동을 했던 '러다이트 운동'을 반복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집중력만을 놓고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한다. 이를테면 집중하지 못해도 밝게 뛰노는 아이들이 있고, 집중 유지 시간이 짧아 더디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기다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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