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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Mar 06. 202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바쁜 현대인

정신 차려, 이 바쁜 세상 속에서

한 여자가 물건들이 마구 어질러진 책상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의자에 앉자마자 안경을 끼고는 무질서 속에서 영수증을 질서 있게 분류한다. 한 남자는 그녀에게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 다가온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로만 그의 말을 듣겠다고 했고, 온 신경은 영수증에 가 있다. 결국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한 그는 그녀의 요구에 따라 군말 없이 시키는 일들을 한다. 두 사람은 그녀에 의해 짧은 순간이지만 몇 가지의 대화를 했고, 몇 가지의 일들을 처리할 뿐이다. 정신없는 상황과 장소, 더군다나 대화마저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 말하는 통에 영화를 보는 나도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첫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바쁜 현대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데 충분했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인 에블린 왕(배우 양자경)은 바쁜 현대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늘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그녀에게 쉼이란 없다. 첫 장면이 그녀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국세청에 세금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식사를 챙긴다. 산 더미처럼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고 계산하면서도, 국수가 5분 이상 삶아지면 면이 퍼져 아버지가 싫어한다며 남편에게 잔소리한다. 영수증 정리가 끝나는 듯싶었지만, 이내 운영하는 세탁소에 손님을 응대하면서 하나뿐인 딸과 틈새 갈등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현대의 모든 사람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수의 현대인들은 낭만과 여유로움을 즐기는 SNS 사진에 시기와 선망, 질투와 부러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아마 바쁜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채우지 못한 욕망을 타인의 사진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바쁘고 정신없이 삶을 살아가는 사진보다 여유로움에 대한 사진이 SNS에 더 많다는 것은, 바쁘고 정신없는 것이 일상이기에 굳이 SNS에 업로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현대인들은 여유로움보다는 바쁨에 더 가깝게 살고 있다.


나 역시 에블린 왕과 같은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것 같다. 삶을 루틴 화하고, 그 일정에 맞춰 움직이기에 십 분도 쉴 틈이 없다. 이를테면 월요일에는 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계획하고 일의 중요도와 긴급성에 따라 분류한 뒤, 정해놓은 순서에 맞춰 업무를 진행한다. 한 주의 계획뿐 아니라, 고작 하루를 살면서도 계획된 일들의 연속이다. 아침 7시에 눈을 뜨면 졸린 몸을 이끌고서 강아지와 아침 산책을 하고서 출근을 한다. 정시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6시 40분, 밥을 해 먹고 나면 7시 20분, 설거지를 하고 나서 강아지와 저녁 산책을 다녀오면 8시 10분, 강아지와 저녁 산책을 다녀와서 씻고 나면 저녁 9시다. 약 3시간가량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서 잠을 잔다. 토요일은 빨래와 집 청소를 하고, 일요일은 테니스를 치고 와서 화장실 청소와 마스크 팩을 한다. 에블린 왕이 그러했듯 나 또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밈과 같이 정신없이 현실을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쉴 틈 없이 사는 일상이 오히려 편하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면 육체적으로는 편할 수 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함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가령 약속 시간을 기다리면서 SNS를 하거나 그저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은 이내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인데, 쓸모없이.' 죄책감은 스스로를 자책하게 하고, 자책은 다음 계획을 수행할 때도 계속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쉼 따위는 내게 방해만 될 뿐이다. 특히 시간을 보내는 데 있어서 그 행위가 생산적이지 않다면? 도통 그 일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내게 의미가 없다.


에블린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하기라도 하듯 남편 에이먼드 왕(배우 키호이콴)은 착하기만 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연출되었다. 또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그녀의 마음이 다칠까 염려해 미리 준비한 이혼 서류를 몇 번이나 망설이다 보여주지 못하는 데, 이는 그의 감성적 태도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아마 이성적인 에블린이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면, 준비하는 즉시 에이먼드에게 서류를 내밀었을 것이다. 이혼을 해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열거하고 서명을 받아냈을 것이라 확신한다. 만약에 나였다면 한발 더 나아가 아마 이혼한 후의 행정적인 진행 절차라든지, 향후 내가 없이도 살 수 있는 방법과 계획들을 알려줬을지도 모르겠다.


이혼 서류는 엉뚱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전달된다. 그는 실수로 이혼 서류를 땅에 떨어 뜨렸고, 에블린에게 들키고 만다. 그제야 그는 이혼서류를 준비한 이유를 그녀에게 마지못해 설명하는데 이유인즉, '이혼에 대해서 서로가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부 사이가 다시 좋아지는 것을 바라서'라고 했다. 이렇게 감성적인 그를 그녀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이 장면에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내가 결혼한 상대에게 부부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아마도 직접적으로 말했을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최근 우리 관계가 소원한 것 같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우리의 관계를 다시 좋게 만들고 싶다.'라고 말이다. 이성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 돌려 말하는 것은 도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 2022. 워터홀컴퍼니(주). All right reserved.

에블린은 현재의 삶을 선택하며 포기해야만 했던 순간들을 멀티버스(다중 우주)를 통해 모두 경험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했던 현재의 삶이 반대로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하는 삶을 살도록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택했던 결혼, 이상을 좇지 않고 꿈을 포기하는 것, 대륙을 옮겨야 하는 장거리 이민 등 수많은 이성적인 선택들로 인해서 오히려 그녀가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나서야 사랑하는 사람들, 그 자체를 선택한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효용을 따지지 않고 사랑의 말들을 전하는 것,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 이런 것들이 그녀가 현재를 살게 하는 삶에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재를 사는 것과 현실적으로 사는 것은 달라야 하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사는 것은 바쁜 현대 사회의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남들보다 많은 일을 처리하면 할수록, 얻는 것이 많아진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돈이 될 수도, 스스로의 역량을 기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주어진 시간은 같은 데, 남들보다도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다. 현대 사회에서는 에블린처럼 이성적이고 효용성에 따라 계산적으로 사고하기 쉽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것은 남들이라는 비교 대상이 필요치 않다. 나의 감정이 중요하고, 나와 상대와의 관계가 중요하고, 나는 사회 속에서 어떤 책임을 갖고 살아가는 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만 돈이 많고 능력이 좋아서 세상을 편하게 사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진부할지 모르지만, 나는 많은 사회 구성원과 함께 관계하며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현실보다는 현재에 살아야 한다.


현재의 내 삶은 겨우 일과 집을 반복하는 단조로움뿐이었지만, 그 모습을 들여다보면 단조로움과 동시에 또 바빴다. 바쁘다는 것을 고집하다 보니까, 단조로움 속에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일을 핑계로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고, 잠자기 전 3시간가량은 온전히 내 시간임에도 함께 사는 강아지의 삶에 마음 쓰는 것만큼 더 깊이 관계하지 못했고, 내면에서 올라오는 쉼에 대한 욕구를 죄책감이라는 불안으로 무시해야 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자칫 바쁘다는 현대의 관념 속에서 현재와 현실을 사는 것을 동일시하게 된다.


종종 친구들과 노지 캠핑을 가서 불 멍을 하며 여유 부릴 때면, 현재를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그 노지 캠핑 장소는 심지어 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산 골짜기에 있다. 외부와 연락만 끊어져도 마음이 한 결 편해지고, 하루 종일 붙들고 있던 전자 기기들은 더 이상 내게 불안과 바쁨을 요구하지 않는다. 연결의 기능이 사라진 핸드폰은 회중시계와 턴테이블 스피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시선이 전자기기에서 해방되니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타들어가며 '타닥'하고 소리 내는 땔감들, 뿜어낸 줄을 타고 땅으로부터 중력을 거슬러서 도망치는 벌레들, 이러한 광경을 신기해하면서 지켜보는 도시 촌놈들, 현재는 그곳에 있었다. 항상 현재에 존재하며 현재에 존재하지 않았던 내 삶은 늘 정신없음의 연속이었다.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시면서 정신없음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현재를 느낀다. 나는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다. "정신 차려! 이 바쁜 세상 속에서."


© 2022. 워터홀컴퍼니(주).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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