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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Mar 16. 2023

안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10·29 참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뉴스를 보며 안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젯밤에는 특별한 대형 사고가 없었구나'. 이게 안도해야 할 만한 일인가 싶으면서도 아침마다 안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정치인들이 시민들을 위한 정책이 아닌 자신들을 위해 권력 투쟁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지칠 때가 많지만, 때론 대형 사고가 없었으니 그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다며 내심 반가움을 느낄 때도 종종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가보지 못했던 10·29 참사 현장을 보러 간 그날 아침도 안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곳에 갈 생각은 없었다. 참사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 들었던 시점은 어느 정도는 현장 정리가 끝난 다음날 아침인 10월 30일이었다. 곧장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고,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했을 때 다행히도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제일 먼저 내 속에 피어났던 것은 공감의 감정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이 다행이라는 착오였음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지만, 그 착오마저도 오랫동안 내게 머물렀던 생각은 아니었다. 내 주변 지인의 아픔이 없었기 때문일까? 내겐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당연히 서울 여행 일정에서도 이태원은 포함되지 않았다. 내게 이태원은 친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꼭 가야만 하는 곳도 아니었다. 나는 관람을 열망했던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를 보러 갔다. 부산에서는 전시나 공연 같은 문화생활을 접할 기회가 서울보다 적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면 문화 생활을 즐기고 내려오는 편이다. 전시가 진행 중인 리움미술관은 한강진역과 이태원역 사이에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금이 이태원 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내리실 역은 이태원, 이태원 역입니다“. 급작스럽게 네이버 지도를 켰고 여기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지하철에서 내렸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꼭 그곳에 가봐야만 할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다시 지도를 열고 근처를 확대했다. 참사 현장은 쉬이 찾을 수 있었는데, 내가 10년 전쯤 가봤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곳은 정확히는 그곳이 아니라, 그 골목을 내려오기 직전에 있는 유럽 느낌이 물씬 나는 레스토랑이었긴 하지만 말이다. 참사 현장에서 리움 미술관까지 거리를 확인하고, 이동 소요 시간을 계산했다. 같이 전시를 보기로 한 친구와의 약속 시간까지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정도였다. 친구는 나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같이 전공했었고, 현재는 보다 발전된 사회복지를 배우고 싶다며 서울의 한 복지시설에서 근무 중인 친구다. 나는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고 이태원 역 1번 출구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친구와의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심지어 친구에게 조금 늦겠다고 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현장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도 더 협소했던 공간, 지하철 역이나 큰 대로변까지 몇 발자국 되지 않는 거리와 폐업해서 방치된 상태의 가게들로 삭막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따뜻함 또한 공존했던 그곳은 내게 많은 생각과 감정을 짊어지게 했다. 그 무게가 무거워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서있기 힘들었다. 무거운 나머지 눈에서 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겨우 옷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그 자리에 십여분 간 멍하니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땅을 바라보면 참사 당일 현장의 혼란과 아픔이 느껴지는 듯했고, 추모 공간에 유가족들의 손 편지나 그곳에서 계속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보면 이 상황이 마치 내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참사 유가족들이, 고인의 친구들이, 슬픔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이 장소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이 장소에 오는 것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고인에게 글을 남긴다는 것 또한 수십 수백 번의 고쳐쓰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그들에게 ‘위로가 최선일까, 사랑의 말들을 전하는 것이 필요할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써야 할까,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말들이 좋을까’ 수도 없이 고민 끝에 적은 글들이었을 것이다. 유가족과 그 주변인들도 아픔을 전부 털어내지 못한 채, 어찌 보면 평생 완성되지 못할 이야기를 남기고 갔을 것이다. 그 심정이 어떠할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붙어 있는 추모의 글들을 통해 조금은 그 마음들을 엿보았다.

ⓒ GWAN-WOO PARK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나는 낮뿐 아니라, 그곳의 밤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와 미술관에 갔는데, 미리 예약이 필요하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했다.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고, 친구에게 참사 현장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했다. 친구도 참사 이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애써 밝은 이야기를 하면서 골목골목을 걸어 그곳에 도착했다. 이제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더 꼼꼼히 현장을 느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편지들을 발견하자마자,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친구 앞에서 눈시울을 붉힐 수 없는 경상도 남자였기에, 서둘러 현장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우리는 이태원의 밤을 보기 위해 저녁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서울로 떠나버린 그의 얼굴을 본 것이 오래되었던 터라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가 진 이태원의 모습이 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내게 가본 적 있던 스페인 음식점이 있다고 했고,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그 현장을 의도적으로 가로질러 갔다. 밤의 이태원은 낮과 달랐다. 폐업한 곳도 분명 있었지만, 영업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게들이 하나둘씩 네온사인을 켰다. 내게 이곳이 이태원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음악 소리도 들렸다.


밤이 되기까지 이태원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곳으로 매일을 출근해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위해서였다. 현장에서 처음으로 주점의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들었을 때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공간에서 그때를 생각나게끔 하는 소음이 거슬리기만 했다. 그도 잠시, 내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했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었다. 그들의 영업을 제한해야 할 이유도, 앞으로 그 장소가 슬픔의 색채만을 가져야 할 이유도, 다양성이 제한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그곳에 뿌리내리고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피해자였고, 피해자이고, 앞으로도 피해자일 것이다. 상권이 죽어서 금전적 피해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참사로 인한 아픈 기억들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였고, 매일 그 현장을 바라보며 견뎌야만 하는 피해자이고, 트라우마로 인해 밀집되어 있는 군중을 앞으로 마주하기 힘들 것이기에 피해자 일 것이다. 피해자만 가득하고, 특별한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기에 분풀이할 대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화라도 내야 그나마 속이 후련할 것 같은데, 그들은 이러한 복합적인 현실 속에서 피해자들이 피해자들을 매일 마주하고 있었다.

ⓒ Bundo KIM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이태원에서의 밤은 주말 늦은 시간임에도 거리는 한산했고, 참사 이전이라면 한참을 기다리며 추위에 떨었어야 했을 테지만 우리는 레스토랑에 곧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식당 앞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밥을 기다리면서 먹노?’라고 말했을 나지만, 그날만큼은 식당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으면 생각했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부산에 내려오는 KTX에서 마저 복합적인 먹먹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마다 나는 안도한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교통사고에도, 작은 건물이 실수든 의도치 않았든 불에 타서 누군가는 생업을 잃는 심각한 일에도, 정치인들의 삿대질에도, 나스닥이 폭락했다는 경제 위기 보도에도 나는 안도한다. 안도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잘 알지만, 대형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한다. 작은 사건 사고가 긍정적이라거나 아픔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각각의 슬픔 앞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때론 상상한다. 신이란 존재를 믿지 않지만, 내가 모든 것의 신이라도 될 수 있다면, 신이 되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고통받고 목숨을 잃는 일 따위는 없애고 싶다. 그러지 못하기에 나는 매일 아침에 안도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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