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도 일상처럼 별일 아닌 듯
서울 가정법원의 아침이란. 협의이혼 대기소에 모인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끼리 앉아 있거나 한 명, 한 명이 따로 서성였다. 마치 한 쌍이라는 개념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곳에서 우린 유일하게 나란히 앉아 이혼절차가 끝나고 점심으로 뭘 먹을지 상의하며 호출을 기다렸다. 우리 대기 번호는 208번이었다.
호출되어 들어간 곳엔 판사님이 멀찍이 앉아 있었다.
“두 분 모두 협의이혼에 동의하십니까?”
“네.”
“네.”
끝. 약 6년간의 결혼이 종결되었다는 확인서가 손에 쥐어졌다.
그 길로 서초 구청에 가서 이혼 신고, 편리하게도 가정법원에서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린다. 모든 게 일사천리다. 일주일쯤 뒤면 호적 정리가 마무리될 거란다.
전에 가정법원에 이혼 서류를 제출하러 왔을 때 남편에게 던진 한마디를 다시 떠올린다.
“결혼할 땐 참 복잡하고 어려웠는데 이혼은 참 쉽다. 그치?”
점심은 소고기로. 남편과 자주 갔던 정육식당에 오랜만에 행차해, 배불리 먹고 카페까지, 둘이서 참 잘도 챙겨 먹었다. 그가 탄 택시를 손 흔들어 배웅하고, 그도 창 너머로 손 흔들고. 함께하던 집에 혼자 돌아온다. 이것이 마지막 이혼절차를 밟은 날 우리, 아니, 나의 행적이다.
혼자 있으니 모든 게 손쉽게 흘러간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되는 일이고 거창할 게 없다. 남편은 참 먹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어서 이것저것 먹어야 했던 것도 많고 차려야 했던 것도 많았는데 이젠 세 가지로 정리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이 세 가지가 어느 정도 조화롭다면 뭐라도 좋다.
남편이랑 헤어지고 약간 무리해서 집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청소했다. 옷 꾸러미를 들고 몇 번이나 의류 수거함을 오며 가며, 함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겠지. 싸구려 옷이 참 많았다. 그동안 사고픈 거 못 사고, 저렴하게 버텨본다고 했던 것들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내게 완벽히 맞지 않아도 싸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내 남편을 싸구려 옷처럼 내다 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키우던 강아지를 차에 태워 외딴곳에 버리고 간 견주를 욕하고, 제가 낳은 아이를 박스에 넣어 버리고 간 이를 욕했던 지난날을 비소한다. 이젠 내 차례다.
그는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도 단출한 이였으니까. 돼지 목에 진주를 어떻게 거냐고. 하지만 그 돼지는 좀 더 나아지고 싶다고 감히 소망했다.
언젠가 도살되어 햄이 되고, 소시지가 되는 대신에 글쎄… 뭐랄까 멧돼지라도 되고 싶었던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아는 건,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비록 빼어난 본새는 없었지만, 그동안 비, 바람으로부터 날 막아주던 옷을 내가 버렸다는 것. 6년간 함께한 이를 가차 없이……
그런 어마어마한 썅년이 나라는 것.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세상에.
그 오랜 세월 누군가의 맘을 상하게 할 까 봐 눈치 보며 살던 사람이, 결국 이 시점에서 이런 짓을? 그는 누구나 멋지다고 할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남자. 내 남자였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나도 모르니까 죽어서 신께 물어보라. 있기나 하다면.
무슨 욕을 먹어야 공평해질까?
내가 그를 버린 것과 꼭 같은 무게로 저울에 달아져야 할 텐데.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결혼은 참 지랄 맞은 행위이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몇 시간을 별거 아닌 이벤트로 서서히 죽여 나가는 것이다. 물론 정말 지루해서 죽기 일보 직전에 식은 끝나고 뷔페가 기다리고 있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뷔페는 미각을 테러하며 사람들을 2차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 와중에 그동안 뿌렸던 축의금이나 회수하면 될 일이다. 적어도 내 결혼식은 철저하게 그런 용도였다. 왜냐면 난 결혼식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꿈꾸던 결혼식은 정말 가까운 사람 몇 모아놓고 소소히 축하받는 것이었다.
난 항상 아웃사이더였고 어느 장소건 어느 행사 건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일 같은 건 없었고 없길 바랐으니까. 나 같은 이에겐 결혼식이 사형식과 다를 바가 없는 부담이지만 그 지랄을 내가 했다.
딸들을 전부 타지에서 결혼시켰는데 아들 하나는 동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던 시어머니의 말은 누누이 들어오던 터였다. 부모님들을 위해서라도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드디어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와 같은 눈을 어떻게 외면하냔 말이다.
예상대로 결혼식은 최악이었다. 분위기는 어느 시골의 오일장 같았으며 드레스는 촌스럽고 예식장은 낡은 티가 역력했고 음식은 영혼이 없는 맛이었다. 웬 정치인 한 명이 자신의 후보 번호가 크게 찍힌 빨간 재킷을 입고 여기저기 식장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하질 않나, 결혼식 사진은 꼭 80년대의 그것과 같다. 난 이 사진을 꼴도 보기 싫어 농 속에만 박아 놨다. 그 예식장이 망한 게 딱히 놀랍지도 않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일을 벌이고 갖은 지랄을 떨며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이제 그 크지도 않은 동네에서 이혼남 꼬리표를 달게 생겼다.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다. 시부모님이 남편에게 동네 창피하니 다시 고향에 내려와서 살 생각 말고 서울에서 방 구해 지내라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성인이고 살고 싶은 곳 어디서든 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냐고 남편 역성을 들었지만.
잠깐, 애초에 원인 제공자가 나라고. 그걸 잊으면 안 되지.
그래서 남편은 바로 옆 동네로 방을 얻어 나갔다. 가족 증명서를 떼면 거기서도 남편은 부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