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편
남자들은 몰라
여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피곤함을. . .
매일 꽉 끼는 속옷착용은 기본이고
옵션으로 꼬챙이에 의존한 신고 다리길이를 늘여야 할 때도 있는걸
더 예쁜 여자 흉내를 내려면
머리부터 다리까지 선 하나 털 하나 열심히 관리하고
매일 열 종류의 화장품을 모공 속까지 채웠다 깨끗히 게워냈다를 반복해야 해
하지만 나한테 진짜 괴로운건 5일 중 하루는 피를 흘려야 한다는 거야.
여행을 위해 짐을 싸다보니
제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필요 없을 물건들이 한가득이잖아
한참을 고민한 끝에
치장을 위한 도구를 살려주는 대신
비상사태를 위해 준비했던 도구들을 빼놓기로 했어
편한복장이 최고 라고 자부하며 다녀온 여행 뒤에는
애정하는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경험이 수차례 있었으니까
오늘은 비오는 하이델베르그를 들렀어
대학도시 이니만큼 비가 추적추적 오는 가운데도 젊은 생기와 기풍을 잃지 않네
유부녀를 사랑했던 괴테의 상처가 책으로 남겨졌던
철학자의 거리를 지나
종교적 이념을 빙자한 오랜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하이델베르그 성에 올랐지
프랑스 국경에 인접해 전쟁의 피해가 많았던 고성은
내부를 처참하게 드러낸 채
상처위에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어
몇 세기에 걸쳐 명문귀족의 터전으로 굳건했던 이곳이
힘없이 무너진 채 나이 들어 가고 있다니. . .
사람들로 하여금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를 사랑하라고
또한 모든 것이 덧없음을 잊지 말라고
아휴~ 이 딱한 것.
수 백년 동안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채
자리를 지키느라 쓰라렸을 성벽의 몸을
살며시 어루만져 보았어.
그때,
건물 내부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시간차를 두고 나에게서도 뭔가 움찔한게 느껴졌어
헐~~ 이 건물이 음기를 불어넣었나
갑자기 예정에 없던 마법에 걸린거야
정확성을 자랑하던 제 생체리듬 시계가 어찌된거지
아놔. . . 다 빼고 두개밖에 안가져왔는데
마트에서 아무리 찾아도 마법을 위한 도구를 찾을 수 없어서 영어로 물었는데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는거야
점원언니는 마트 안의 손님들에게 큰소리로 뭐라뭐라 했어
알고보니 그건 손님 중 영어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거 였고
무슨 일인지 궁금한 사람 너댓명과 영어를 아주 쬐끔 아는 사람 서너명이 나를 둘렀어
대학도시라 학생들은 죄다 대학에 들어가 있는지 나이 지긋하신 이모님들 뿐이었지
같은 라틴문자를 쓰는 독일사람들이 영어를 잘할 것 같잖아?
아니. . . 우리때 사교육없이 영어를 배운 고등학생 정도야.
그것도 입시를 위해 절실히 배운 우리와는 달라.
'왜 우리가 힘들여 다른 나라언어를 배워야하지?
우린 세계 4위 경제대국이고 피파랭킹 2위야.
니들이 우리말을 배워야 할껄?'
라고 생각하나 봐
아랫도리로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민망한 바디랭귀지도 통하지않아 애가 타는데
그 상황에서도 사람들끼리 토론을 하며
내 의중을 깨달아 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우스웠어
행인1 트래져? 클로드?(바지? 옷 말야?)
나 노, 잇츠 낫 클로드(아니, 옷은 아네요)
블러드 블러드!(지금 여기서 피가나요!)
잇츠 어. . . . 다이애퍼 폴 워먼.
(이건. . .말하자면 여자가 쓰는 기저귀예요)
행인2 언더웨어? (속옷말이야?)
나 노.. 잇츠 디써포저블. . .
(아니요 이건 일회용이예요)
위 유스 잇 듀어링 멘스츄레이션 페리어드
(있잖아요. 그 기간에 쓰는거. . .)
행인3 롸잇 프리즈 (써봐 아무래도 니 발음이 구려서 못 알아듣는거 같애)
나 음. . .이즈 베럴 투 드로워 픽쳘
(스펠링에 자신 없으니 그리는게 낫겠어요.)
결국 누군가가 내민 영수증에다
길쭉한 후렌치파이 옆에
앙증맞은 날개를 단 그림을 그렸어.
그제서야 알아들은 독일여성들은
아하! 박장대소를 하며 나를 감싸안았지
점원언니는 미로처럼 생긴 통로지나 수 십가지 생리대가 전시되어 있는 곳을 데려다 주었어.
이게 다 데이터로밍을 해가지 않아서 생긴 일이지.
독일어로 생리대를 치면 damenbinde!
바로 나오잖아.
해외로 갈 때에는
자신이 스마트 하지 않으면
스마트 폰이라도 꼭 쓸 수 있게 해서 가자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일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