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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Nov 22. 2016

체스키크룸로프를 걷다1

저렴한 숙소를 소개합니다

버스를 탔습니다

신나게 상모를 돌리다 깨어나니 내리랍니다

역시 움직이는 것들 안에서 자는 잠은 너무 달달합니다

말머리성운까지는 족히 갔을 정신세계를 다시 추스르고

몸뚱이의 모든 뼈들을 직립보행에 적절하도록 배열을 하는데에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이곳에 온 연유는 이렇습니다

프라하에서 두세 시간만 가면 도달할 정도로

아주 가까울 것이라 생각했던 비엔나가 

대여섯 시간을 버스 안에 쪼그리고 있어야만 도착할 수 있다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곳을 다른 곳을 고르다 보니 체스키 크룸로프였습니다

유럽 여행 코스 중 매우 아름답지만

3시간만 둘러보면 손바닥 보듯 뻔해지고

해가 지면 할 일 없어 심심해 죽는다는.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

해가 지기 전까지 기를 쓰고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는

작은 마을로 알려져 있죠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보호받는 관계로

시가지까지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버스는 멀찍한 곳에 우릴 던져두고 도망갑니다

차들은 마을에 단 세 곳뿐인 주차장에 세워져 있군요

이런 젠장...

유인원의 자세로

광장까지 어그적 어그적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알아요


이곳은요

아침에 커피숍에서 코페르니 쿠스틱 한

인상적인 남성을 보았다면

 

하루 종일 그 사람을 세 번은 마주칠 정도로 작고


마을 끝에서 용변이 급하다면

유료화장실을 여유 있게 쌩까고

정 가운데 위치한 집까지 달려오는 데에도 무리가 없는

완만한 곳이란 걸요



중심지로 알려진 광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어!



여기 좀 예쁘잖아?


몇 걸음 걸으면 윈도 화면


또는 엽서 사진


달력 풍광이라니


이렇게 꾸물꾸물 한 날에

발 사진을 주로 찍는

제가 찍었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가을 가을 한 상점들 하며



의미심장한 조형물에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과





유머 코드까지 마음에 쏙 드는

뻑킹 밀크 갓 비어!라고??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인증샷 몇 컷 찍고 

넘들이 권하는 코스대로 3시간 만에

다른 곳으로 가려니


안돼 안돼

이렇게 갈 수는 없어

하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듭니다

이렇게 느낌이 팍! 오는 곳에서는 무조건 자고 가야죠


이곳에서 태어난 작가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이 있어요

권태가 두려워 짧은 사랑만을 즐기는 바람둥이 외과의사 토마시는

많은 여자들과 잠을 자면서도

함께 온전히 밤을 보내진 않습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서둘러 돌려보내죠

밤을 보내고 나면

한 사람에 정이 생기는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소설 속에서 그는

짧은 호기심이나 쾌락을 위해 만난 사이라도

가장 뜨거운 시간과 차가운 시간을 함께 보낸 후에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토마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초로 온전한 하루를 함께 보내버린

웨이트리스 테레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공간도 그렇겠죠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나면

어제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 있답니다

특히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곳은

어떤 영감을 줄지요

어차피 우린 정해진 건 하나 없이

그날그날 숙소 예약하고 상황 봐서 이동하는 자유여행이니

망설임 없이 서둘러 앱에서 숙소를 예약합니다


모든 볼거리에 근접한,

17세기에 지어진

muzeum vltavinu residence입니다



엘베 따윈 없어서 산을 오르듯 기어 올라가


쓰러지듯 도착해 통나무 현관문을 열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

아무 데나 급하게 자리 잡은 컴퓨터가

전실에 떡하니 놓여있


식탁엔 소박한 웰컴 차가 놓여있는



레드와 화이트 블랙으로 꾸며진 안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가구와 살림들은 심플하고 청결한 곳이었습니다


안방엔 부부가 저절로 정다워질 소파와 테이블


그에 반해

원하면 갈라설 수도 있는 침대


작은방

 하루를 돌아보며 일기를 쓰기에 좋을

스탠드와 책상.

안방과 같은 침대가 있네요



유일하게 화장실 벽색만이 조금 올드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렴 어때요

샤워기 뜨거운 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것을 확인할 때의 기쁨이란

모든 걸 용서를 하고도 남습니다


얼른 빨래를 해서 널어야지 

하는 생각을 들게하는

사다리 모양 라디에이터도 반갑습니다


주방으로 가봅니다


돼지 한 마리를 정형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칼 세트

저녁 만찬을 위한 식기들도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네요



아니...

도대체 뭘 해 먹으라고

이것들을 다 갖춰 놓은 건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

아... 아니 취소합니다


이런 건 원래 구색 갖추느라 있는 거지 

모두 사용하라는 뜻은 아니니까요

낮에 애 셋 데리고 다니느라 힘든데

매일 저녁때 집으로 와서 또 음식을 해야 한다면

내가 이러려고 여행 왔나

자괴감 들고 괴롭지



도대체 없는 것이 없는 도구들

이렇게도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는지


알뜰살뜰한 주부가 방금 전까지 살림을 살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건물 1층에 있는 박물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만 나는 독특한 보석을 전시한다고 합니다만

리셉션에 진열된 몇 가지만 보고는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특정지역에서만 나는 귀한 것에 대해,

또 그것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자부심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이것들은 도무지 이뻐 보이지도 않고 비싸 보이지도 않는

그냥 흔한 비취색 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네.. 제가 이런 안목이 전혀 없는 사람인 거죠


숙소 1층 문을 열고 나가니

오후 들어 따땃해진 햇볕과

그에 꼭 어울리는 커피 향이

좁은 거리를 채우고 있네요


한 사람당 5천 원 추가로 근사한 아침식사를 집 앞으로 배달해주기까지 하는 이숙소는

4인 기준 5만 8천, 

2인 기준 3만 3천 원입니다

모두들 반나절만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

이곳 외에도 놀랄만큼 싸고

그림같이 예쁜 집들이

텅텅 빈 채 아침을 맞고 있다는 것이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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