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다 예쁘다 그러나 심심하다
밤은 급히 왔습니다
타지로 떠나는 막차는 오후 6시 15분.
사람들은 서둘러
기차나 버스 또는 셔틀을 타고 흩어졌고
어둠이 내려온 거리엔
기분 좋은 고요와 여백이 생깁니다
지금부터는 황금색 조명이 주인공이 되어
자연과 사람이 만든 조촐한 무대 위에서
수세기 동안 굳건했던 소품들을 은근히 비추어주겠죠
작은 손전등을 들고
그와 같은 마음이 되어
낮동안 사람들이 밟고 간 자리를
구석구석
어루만지듯 지나가 봅니다
야경행은 몇 분 안에 끝납니다
이 밤에 어울리는 재즈바와 펍등
일부 가게만이 겨우 10시 반까지 열려있고
대부분의 상점은 6시면 셔터를 내리고
밤이 아쉬운 여행자와
몇몇 주민들만이 남습니다
대륙 안으로 파고드는 혹독한 바람을 비하기 위해
나무문을 이중으로 덧대어 겹문을 만들었는데
닫힌 모양마저도 보행자를 즐겁게 해주는 데에 일조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숙소로 돌아와
할 일 없는 이들이 늘 그렇듯
tv를 보며 맥주를 마십니다
아!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는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 tv에는 안 나오는 장면이 마구마구 나오니까요
유럽의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일찍 잠드는 이유는
폭넓은 시청권을 보장받기 위해
부모들이 강제 취침에 들게 하는 게 아닐까요
15분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며 화면을 보고 있으니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제아무리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유럽이라 해도
우리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라는 저의 예측은 빗나가는군요
사람의 절단된 오른쪽 다리가 아닌
씨알이 굵은 생선을 낚은 어부의 웃는 얼굴이
뉴스에 보도된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를 생각하며
하루 동안 이국의 활자로 고통을 겪었을 시신경을 위해
차라리 집에서 가져온 책을 펼쳐 듭니다
간만의 깊은 잠으로 체스키크롬로프에서의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이 시간은 가끔 제가 막 침대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기도 한데
제가 기상을 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점심시간일 테죠
게으르기 짝이 없는 제가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오니 새벽형 인간이라는 말을 듣겠습니다
사람은 아직 잠들어 있으나 사물들은 깨어 있는
파란 시간의 나들이를 즐깁니다
이대로 길을 잃어도 좋겠다 했더니
실제로 길을 잃고 맙니다
둘째는
"저 길이야
내가 아까 황금색 돌을 밟으면서 왔어"
셋째는
"저 장난감 가게 쪽이야
내가 오면서 보고 장난감 사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첫째는
"아냐 지도에서 보면 이 길이 우리 집으로 통하는 빠른 길이야"
아마도 어느 쪽으로 가든 집은 나오겠지요
저는
"그냥 보이는 길로 가보자
헤매 봤자 얼마나 걸리겠어
쉬엄쉬엄 걷다 보면 언제가 짠 하고 눈앞에 나타나겠지
목적지만 명확하면 불안할게 전혀 없다니까"
늘 이렇게 말하지만 가장 불안한 건 저였죠
출발한 슈퍼로 되돌아가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듯 되짚으며
이번에도 둘째의 감에 기대어 무사히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첫 아이는 성실합니다
직접 걸어가 건물마다 붙어있는 거리명을 대조하며
아닌 길을 배제하며 길을 찾습니다
둘째 아이는 감이 있습니다
확신 없이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길을 추측합니다
누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성실한 사람의 노력은 당할 수 없다 배웠는데
감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늘 운이 따르는 게 현실이니까요
어제 세운 계획들을 하나하나
실천합니다
1. 아침이 배달되면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를 구경해야지
저렴한 가격에 기분 좋은 아침이 배달되었습니다
창밖으로 가지고 나가니
마침 체스키크롬로프 성으로 소풍을 온 인근 학교의 아이들이 보입니다
걸어서 소풍을 이곳으로 오는 저 아이들은
전생에 어떤 덕을 쌓았을까요
2. 사진 찍을 때마다 끼어드는 저 도도한 탑
따뜻한 오후가 되면 저곳으로 가서
햇빛이 만든 따스한 감도의 시내를 내려다보며
몇 시간이고 보내야지
가파른 계단을 돌고 돌아 올라가서 만난 풍경은
다른 높은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아 실망입니다
체스키크롬로프를 여행하기에는
화창하게 개인 날보다는
지금처럼 약간 울먹울먹 한 하늘이.
햇살 강한 여름날보다는
도톰한 옷이 필요한 계절이
더 잘 어울릴 듯싶습니다
물론 다른 계절에 와본 적은 없지만
마을의 전체적인 색채가
생각의 여지를 주기에 가장 적합한
다운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쓸 만한 사진을 건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예쁜 것을 가장 강한 채도로 카메라에 담는 것이 주목적이요
남는 것은 그 사진뿐인 여행이라면
그야말로 시간낭비 돈 낭비일 테니까요
3. 이발사의 다리에 가서
생음악을 들으며 핫와인을 마셔야지
시종일관 경쾌한 음악 일색이었던 프라하의 악사들과는 대조적으로
멍하게 생각에 잠기게 하는 음악입니다
세계의 유명한 곳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리에 얽힌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다리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지역 군주였던 루돌프 2세의 아들은
심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이발사의 딸이 목 졸린 채 숨져 있었답니다
필시 아들이 한 짓이라 수군거리자
군주는 범인이 나올 때까지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하루 한 사람씩 죽였습니다
사람들의 희생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현자가
자기가 죽였노라 거짓자백을 하곤
사형에 처해졌는데
그가 바로 죽은 여인의 아버지였답니다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다리를 놓았고
다리의 이름은 이발사의 다리라 칭했다 하는
그럴싸한 이야기입니다
4. 에곤 쉴레 갤러리에 가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야한 그림들을 그렸나 생각해봐야지
오스트리아인인 에곤 쉴레는 그의 어머니의 고향인 체스키크롬로프를 좋아해서
이곳에 터전을 잡고 오래 머물고 싶어 했지만
어린 여자아이의 자위하는 모습을 그리다
그의 아버지에게 고발당하고 마을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갤러리에는
1층에는 무명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고
2층에 에곤 실레의 작품이 있었는데
에곤 실레를 감상하기 위해서 그 모두를 합한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
끼워팔기와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미술에 대해 전혀 식견이 없는 저로서는
그의 그림을 아이와 함께 보는 것이
다소 거북하게 느껴졌기에
입구에서 다시 돌아나왔습니다
그리고. . .
아직도 못 본 곳이 발목을 붙들어
하루치의 숙박비를 더 결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