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와 살기로 했다

혼자가 행복한 시대에 결혼 결심하기

by 일희

팔월 초사흗날 예쁜 초승달 밑에서 몰래 준비한 커다란 해바라기와 목걸이를 내밀며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는 너와, 나는 함께하기로 했다.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 시간 내내 너와 함께할 나의 모습을 상상해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할 줄 알았다던 여느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낌이 왔던 건지, 안정된 직장이 생긴 후에 만난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 자연스레 그리 되었던 건지, 사랑이 깊어지기 전부터 결혼에 대해 이야기해오던 너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혼하자는 네 말이 성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막연히 이 사람은 아닌 거 같다 느껴졌던 어린날의 인연을 정리한 후에, 나의 인생의 길에 함께 오를 이 가 어떤 사람이면 좋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책 읽는 걸 나만큼 좋아하지만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운동도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고 해보지 못한 일에 용감하게 도전하지만 집이 제일 좋은 집돌이면 좋겠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자기 눈에 비친 사랑스러운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를 너무 사랑하지만 나 없이도 잘 살아가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런 남자는 없어. 너는 혼자 살아야겠다."라고 단정 지어 말했다. 아빠마저도 나를 까다롭고 눈 높은 사람 취급하며 너는 결혼 못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저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조금만 노력해도 나와 딱 맞물릴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절친해지는 친구와 아무리 잘 지내려 애를 써도 어긋나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가족 구성원중에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게 '남편'이니, 새롭게 꾸릴 나의 집에서는 노력하지 않아도 편안하기를 원했다. 애써 노력하며 연인과의 관계를 이끌어 나가느니 마음 맞는 친구들과 지내는 게 진정으로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몇 사람을 지나 새벽이슬이 맺히기 시작한 시월의 어느 날, 첫 만남에 시골역을 가자던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낯선이 와의 어색함을 술로 달래려는 사람들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와 대화의 빈자리를 사진으로 채우던 네 모습을 볼 때 내 머릿속에선 종소리가 들렸다. '대박. 이 사람은 나랑 닮은 사람이다.'


공영자전거를 타며 천변을 달리는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는 사람. 스무 살에 다녀온 인도 이야기를 들려주며 수줍게 웃는 사람. 파병도 다녀오고, 비행기를 만들고, 직접 계획한 경로로 국토대장정에 다녀온 사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프로필에 가득하고 그 친구들과 축구하는 걸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 날엔 도서관에 가는 사람. 그리고 약속 없는 주말엔 집에서 푹 쉬는 걸 좋아하는 사람. 게다가 커다란 키와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생각했던 것만큼 너와 내가 꼭 닮은건 아니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고 하루 종일 연락하는걸 불편해했다. 여행 스타일도 달랐고 나보다 많이 용감했다. 큰 싸움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잘한 의견 충돌을 겪으며 네가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이대로 둬도 될지 고민하게 됐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결혼의 확신을 얻었을까? 저 사람과 내가 살아온 날 보다 많은 날을 함께해도 될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어려움이 닥쳐와도 잘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믿고 맡길 수 있을까?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먼저 취미를 나누었다. 너는 나에게 스키와 야구를, 나는 너에게 캠핑과 낚시를 배웠다. 처음 해본 일이라 재미없을 때도 있고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유쾌하게 지나갔다.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삶의 빛깔이 다채로워졌다. 취미를 나누며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 자신, 이슈, 결혼 후의 삶, 그리고 페미니즘이나 가부장제와 같은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화를 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가늠해보았다. 네 의견에 설득되기도 하고, 내 의견을 주장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함께 성장했다. 여행 가서 값비싼 선물을 잃어버려 의도치 않게 너를 화나게 하기도 하고 타향살이에 외롭고 지친 내가 바쁜 너에게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했다. 함께 하며 변화해가는 내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태양이 되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너를 보며, 나 역시 그렇다고 느꼈을 때, 나는 너와 내 남은 삶을 함께하기로 했다. 어두운 밤에 힘을 합쳐 새로 산 커다란 텐트를 칠 때처럼, 힘든 네가 나에게 기대고 지친 내가 너에게 기대던 그날처럼, 매미 우는소리 들으며 서운했던 일을 조곤조곤 나누었던 때처럼,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 그 모든 순간들처럼,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며 청혼하는 너와, 나는 살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