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자유여행. 그때는 모든 관광지 예약은 기본 중의 기본이요, 두어 개의 후보 식당을 미리 준비하고 분단위까지 시간 계획을 세웠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계획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졌고, 그 속에서 마주친 순간들에서 특별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슬란드 배낭여행은 난이도가 높다고 소문이 나서 다들 미리 동선을 짜고 인터넷에 일정 검사까지 받던데, 우리는 갑자기 묵게 된 호텔에 마침 빙하투어 예약 서비스가 있어 즉흥적으로 스카프타펠에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일정에 맞는 첫 타임 자리가 비어있었으니 우리의 신혼여행을 축복하듯 행운도 따라주었다.
시력 검사하면 보이는 검안기 속 사진 같은 풍경.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지 며칠 되었지만 그림 같은 풍경이 매 순간 맘을 설레게 한다.
곡괭이를 받고 아이젠을 착용하고 안전수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간단한 투어라고 들었는데 그럴듯한 장비를 지급받으니 다이내믹한 체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설렌다.
잠시의 설렘을 비웃듯 얼음 덮인 산을 아주 잠깐 걸어 다니는 정도에서 끝이 났다. 가이드가 다양한 설명을 해 주었는데 반만 알아들었다. 이런 순간마다 짧은 영어가 아쉽다. 집에 가면 당장 공부를 시작할 것 같지만 막상 책상에 앉으면 삼십 분도 채 못 가서 포기하게 되겠지..
그래도 지구과학시간에 배운 빙하가 지나간 길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사실이 맘을 들뜨게 한다. 진로를 정하기 전에 아이슬란드에 와보았다면 지구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멋진 곳이다.
빙하라 하면 바다에 떠있는 얼음덩어리를 막연히 생각했는데, 눈이 오랫동안 쌓여 얼음이 되어 육지를 덮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겨울에 오면 파랗고 반짝이고 미끄러운 얼음을 볼 수 있다는데, 여름이라 얼음이 많이 녹아 그냥 눈 덮인 산을 걷는듯한 기분이었다. 빙하 위를 걸었다는 신기함과 생각했던 빙하가 아니라는 실망감이 함께한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친절한 가이드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탐험가처럼 나와 개인적으로 참 맘에 드는 사진이다.
스카프타펠에서 내려와 맑은 날씨에 기분 좋게 운전하고 가다 보니 금방 요쿨살론에 도착했다.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자연스레 눈을 감는다. 나름대로 몇 년간 문제없이 운전하고 다녔다고 생각하는데, 근 10년간 운전한 남편이 보기에는 미숙해 보이나 보다. 티격태격하다가 남편이 운전을 도맡아 하겠다고 했는데, 열흘 내내 혼자 운전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나도 운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힘든 일을 남편이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운전하면 잔소리하고 싶어 지는 남편은 자연스레 눈을 감는다. 자지 않고 있으면 내가 남편을 부추긴다.
"오빠! 얼른 자! 피곤해! "
원래는 남부 투어만 할 작정이라 요쿨살론은 돌아오는 길에 보려고 했는데, 반만 돌기 아쉬워 링로드 투어로 급 일정을 변경했다. 요쿨살론은 관광객들이 북적북적해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찍은 빛과 보정이 가득한 사진보다는 못했지만, 난생처음 보는 얼음이 둥둥 떠있는 풍경이 참 신기했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빙하랑 비슷하기도 했고.
아이슬란드는 눈이 닿는 곳곳마다 자연이 낯설어 외국임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지만, 이렇게 큰 차를 만날 때마다 더욱더 다른 환경이라는 것을 느낀다.
지구 반대편까지 큰돈 쓰고 날아왔음에도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탐험 같은 신혼여행이지만, 그래도 신혼여행이라고 사랑이 가득한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맘에든다.
오늘은 무려 377km를 달려가는 대장정이다. 한국에서는 200km만 넘어가도 힘들고 지치는데 아이슬란드에서의 운전은 지루하지 않다. 그래도 기나긴 운전에 지치는 몸은 어쩔 수 없어 쉼터에서 잠시 멈춰 섰다.
여행을 돌이켜보는 지금은 무엇 때문인지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이유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언제 맑았냐는 듯 하늘도 흐리다. 가만히 앉아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우리는 기분이 상해도 싸움으로 가는 법이 없이 잠시 맘을 다스리고 대화한다. 참 좋은 사람을 만났다 싶은 순간이다.
오늘의 숙소인 에이일스타디르 캠핑장에 도착했다. 카운터를 비롯한 시설들이 아주 깔끔하다. 처음으로 환전해온 동전을 사용해 빨래도 했다. 추운 날씨에 몸이 꽁꽁 얼었지만 용기 내 샤워도 했다. 무료로 따뜻한 물까지 나오는 깨끗한 샤워실이 참 맘에 들었다.
캠핑장 한편에 마련된 오두막에서 식사를 했다. 바람이 막아지지 않아 비 오는 날씨에 많이 추웠다. 지저분한 테이블은 물티슈로 닦아도 닦아도 음식을 놓을 엄두가 안나 또다시 우리의 보자기 식탁보를 펼쳤다. 가져온 건조 김치 블록을 이용해서 김치찌개를 끓여먹었다.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추운 바람을 맞으며 맛보는 한국의 맛이란..!
마트에서 숯불구이를 할 수 있는 간이 키트를 구입해 기대하며 불을 지폈다. 인터넷에서 본 후기 사진은 참 운치 있고 요리도 잘 되던데, 불이 너무 약해 고기가 익질 않는다. 결국 프라이팬에 구워 먹었다. 그 사람들도 사진만 찍고 따로 구워 먹지 않았을까? 평범한 목살인 줄 알고 산 스테이크도 훈제된 고기였다. 맛이 조금 짰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