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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희 Apr 24. 2021

퍼핀 없는 퍼핀 서식지와 데티포스

무계획으로 떠난 여행에선 귀여운 새를 만날 수 없다.



  신혼여행으로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지 2년 하고도 8개월이 흘렀다.

  그날그날의 감정을 잘 기록해서, 다녀와서 책 한 권 분량의 여행기를 쓰리라 했던 당찬 포부는 21시가 넘어도 지지 않는 해와 그와 함께하는 강행군에 증발해 버렸고, 기억을 잃기 전에 브런치에 짧은 글이라도 멋들어지게 남겨보자 했던 작은 다짐은 바빠진 일상에 치여버렸고, 밤톨같이 작아진 당초의 계획은 운영하던 블로그에 일정을 기록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블로그에 기록한 최소한의 노력이 씨앗이 되어, 여유가 조금 생긴 어느 봄날 희미해진 기억이나마 붙잡아 보려 여행기를 이어간다.



  남한만 한 면적에 인구는 30만밖에 안 되는 아이슬란드는, 레이캬비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마을이 자그마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우와 여기 정말 예쁘다! 내려서 구경하고 카페라도 가보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딱히 정차할만한 포인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퍼핀 서식지를 가던 이 날도 아기자기한 마을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커피 한잔 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그냥 지나쳤다.



  퍼핀 서식지에 도착했는데 첫인상이 불길하다. 흐린 날씨와 엄청난 강풍, 그리고 도무지 귀여운 새가 있을 것 같지 않은 풍경. 그래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작은 화장실이 있어 다행이었다.



  후드에 달린 끈을 동여매고 바람을 뚫고 계단을 올랐다. 내 상상 속의 퍼핀 서식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여행을 떠나기 전, 퍼핀 사진을 찍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글을 여럿 읽었던 터였다. 물론 이곳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퍼핀이 있는 곳은 날씨가 맑고 자연이 아름다워 황홀하다 못해 낙상사고까지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지 않나? 분명 내가 있는 이곳은 그런 장소는 아니었다.

  


  계단을 다 올라왔는데 도무지 퍼핀이 보이지 않는다. 저 절벽에 있는 새가 퍼핀인가? 카메라를 확대해 사진을 찍었으나 어떻게 봐도 퍼핀은 아니다. 우리가 잘못 왔을까? 원래 퍼핀이 별로 없나?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안내판이 보인다.



  퍼핀은 5월 1일에서 8월 15일까지 관측할 수 있었다. 오늘은 8월 24일. 한 발 늦었다. 그들은 철새였던 것이다. 애초에 남부 투어만 할 작정이어서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탓이다. 많은 새들이 날씨에 따라 지역을 옮겨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퍼핀은 일 년 내내 아이슬란드에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차가운 바람에 시린 손만큼 마음이 쓸쓸했다.



  퍼핀을 만나고자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빵 터져버리고 그 자리엔 주린 배와 아이슬란드의 매서운 바람만 남았다. 아쉬움을 달래고자 아이슬란드 여행자들의 주식인 핫도그를 만들어 먹었다. 남들은 호화롭게 다니는 신혼여행에 와서, 그만큼 많은 돈을 쓰고도 자동차 옆에 쭈그려 앉아 핫도그나 굽고 있는 게 웃기는 노릇이다. 그래도 핫도그는 정말 맛있었다. 마지막 날 레이캬비크에서 사 먹은 핫도그보다도 맛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때의 기억으로 한국에 와서도 종종 핫도그를 만들어 먹는다.



  배도 채우고 마음도 채우고 다시 힘차게 데티포스로 향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 남편은  즐거워했다. 울퉁불퉁 험한 길을 작은 경차들도 열심히 달렸다. 언젠가 우리도 아이슬란드에 다시 오게되면 저렇게 작은 차를 타고 여행해 볼까? 이루어지기 힘든 이야기를 나눴다.  



  비 오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오니 차의 상태가 처참하다. 그래도 흙탕물을 뒤집어쓴 차가 훈장같이 자랑스러워 사진으로 남겼다. 벌써 2천 킬로미터 가까이 운전했다. 춥고 배고프지만 이 얼마나 익스트림하고 잊지 못할 신혼여행인지, 우리 스스로가 기특했다. 남편이 세차하자고 했지만 나의 훈장을 없앨 수 없어 반대했다가, 트렁크에 짐을 싣고 내릴 때마다 옷을 버렸다.



  인랜드에서는 여기가 외계행성 아닌가 싶었는데 데티포스에서는 이곳이 백악기 시대가 아닌가? 싶었다. 백악기 시대에 어떤 풍경이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지만 마치 공룡이 살 것 같은 풍경이었다는 뜻이다. 지금 다시 사진을 보는 이 순간에도 내가 본 풍경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흐린 날씨에 절벽 한쪽에만 햇빛이 비치는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워서 영화 CG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든 서클의 굴포스가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이었다면 데티포스는 두렵고 거대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유량과 유속에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민간신앙이 왜 발달했는지 알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히 그 어떤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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