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맘의 비애
의욕이 없다. 잠을 잘 자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젖병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고 주방을 보면 숨이 막힌다. 거실을 보니 도망가고 싶다. 바라고 바라던 휴직이건만 출산휴가 세 달, 육아휴직 시작한 지 2주 만에 집에 있는 게 지긋지긋해졌다. 그래도 아이 둘이나 있는 엄마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의 아내라, 꾸역꾸역 식기세척기와 세탁기를 돌려놓고 태블릿과 키보드를 가지고 근처 카페로 나왔다.
워킹맘으로 지내던 지난 1년 3개월 동안 죽을 만큼 힘들어서, 둘째를 낳고 최소 2년은 휴직하리라 마음먹었다. 회사와 가사를 병행하며 둘째까지 품고 있는 게 고역이라, 눈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출산휴가까지 세 달.. 두 달.. 한 달.. 조금만 더 힘내자.. 카운트다운 하면서.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출산(전) 휴가는 만삭의 몸으로 수족구 걸린 첫째를 가정보육하느라 지나가버리고, 출산하고 집에 와서 신생아와 씨름하며 몸을 회복하느라 회사를 안 간다는 생각도 없었고, 12월 들어 아, 내가 진짜 회사에 안 가는구나. 생각하던 터였다. 그 기쁨도 잠시, 오늘이 12월 27일이니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집을 탈출하고 싶어졌다.
인터넷상에서는 '전업맘'과 '워킹맘'간의 고난 배틀이 일어나곤 한다. 나는 일할 때는 워킹맘 대열에 들었다가, 휴직하면 전업맘 편에 서곤 한다. 인간이란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내 손톱밑 가시가 더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 분명 나는 집에 있어보기도 했고 일도 해봤는데, 어떤 것이 더 힘들다 말할 수 없이 그냥 내가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든 것이다.
만삭에 가사와 육아와 회사업무를 병행하며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참 나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분명 그때보다 훨씬 편안한 상황인데 뭐가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생각해보니 일과 휴식의 구분이 없어진 탓이다. 열심히 일하고 치열한 하루를 보낸 후 집에 와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임시로나마 전업(全業) 주부가 되고 나니 이 집안이 나의 일터가 되는 것이다. 일할 때에는 남편과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분담했는데, 집에 있으니 육아는 분담해도 집안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게다가 미운 4살을 앞둔 아이는 나에게서 떨어지질 않으니 육아시간도 길어졌다. 일터에서 살고 있으니 쉬려 해도 눈에 보이는 집안일, 머릿속을 팽팽도는 해야 할 일 목록이 나를 옥죄어온다. 내가 먹어야 할 식사조차 휴식이 아니라 장보기, 요리하기, 설거지하기를 동반하는 괴로운 일이다.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출근시간 그러니까 큰아이 하원시간을 두 시간 앞두고 작은아이를 남편한테 맡겨둔 채 집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먼 곳에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 다녀오라 했지만, 차로 이동하는 시간도 아까워 집 근처의 카페에 왔다. 차를 타면 하원하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맘이 답답하다. 겨울이라 더욱 누리지 못하고 있는 바깥공기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오늘은 큰아이 하원하면 야외활동 좀 해야겠다, 생각하는 나는 퇴근해서도 일생각 하는 직장인 같다.
카페에 들어왔는데 상대적으로 더운 공기에 실망감이 든다. 그냥 산책이나 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 마음을 글로 쓰고 싶어 방금 집에서 마시고 온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잔 더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차가운 음료를 마시니 카페의 공기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높은 천장의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 god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니 기분이 좋다. 이럴 수가. 나의 휴식처는 집 바깥에 있었다. 전업맘의 비애다.
누가 이 고통을 알아줄까? 직장에서 퇴근 없이 살고 있는 같은 전업주부들만이 나눌 수 있는 고통이다. 자아실현도 없고, 승진과 월급의 보상도 없고, 잘하면 본전인 육아와 가사를 도맡아 하는 나를 잃어버린 삶.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가족들을 위해 흘러가고 있는 이 시간 동안 나를위한 짬을 내보려고. 엄마와 아내가 아닌, 직장인인 나를 일시정지해도 글 쓰는 내가 남아있도록 시간을 내본다. 오래전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이가 어린이집 갔을 때 청소하지 말아라. 전업주부는 그 시간이 퇴근시간이다. 큰아이가 엄마 껌딱지가 되어 밤 10시까지 육아하는 입장에서 참 공감되는 이야기이다. 둘째가 아직 어려 낮시간도 충분히 누릴 순 없지만, 그래도 낮엔 외출도 많이 하고 웬만한 집안일은 밤에 하기로 다짐해 본다. 육아라는 장기 레이스에서 정신건강을 지키고 나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내 삶의 많은 순간에 '그때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