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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들지 않는 여행 <프랑스에서 몸으로 90일>

신간 여행 에세이 추천

by 책읽는제이


외국에 갈 때마다 꼭 빼놓지 않는 코스가 있다. 바로 그 나라의 재래 시장이나 유명하지 않은 동네를 가보 것이다. 관광지 구경이나 쇼핑을 하는 것보다도 현지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작은 식당에서 어떤 음식인지 상상이 되지 않는 메뉴를 시키거나, 시장을 돌아다니며 어색하게 현지인과 대화를 나눴던 경험은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서평 의뢰가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서평 의뢰가 들어와도 모두 거절을 했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아닌데 서평을 써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책은 왠지 끌렸다. 프랑스에서 90일? 게다가 돈 들지 않는 여행이라니..



가장 위대한 여행자는
세계를 열 바퀴 돈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한 번 돌아본 사람이다.
-간디-


저자는 3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해온 한 집안의 가장이다. 가족을 위해 쉼 없이 달렸던 그에게 마침내 인생의 후반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가족부양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끊임없이 담장 밖의 삶을 기웃거렸던 저자는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을 정리하며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는 성찰의 여행이 되길 바랐다.



WWOOF는 World Wide Opportunintes on Orgarnic Farms의 약칭으로 유기 영농을 영위하는 전 세계 농부들의 네트워크이자 호스트와 여행자들이 일상의 삶을 나누고 문화를 교류하는 플랫폼이다. 땅과 집을 가진 호스트들은 농가를 방문하여 일정 시간 노동력을 제공하는 여행자(Woofer:우퍼)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전 세계 130여 개의 나라에서 1만 5천 곳 이상의 호스트가 매년 수만 명의 여행자를 맞이하고 있다.
거기에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삶의 지혜가 있고 경쟁과 생존을 위해 지친 심신들이 생기를 회복하는 치유의 시간이 마련돼 있다. 낯선 사람들과 교감하며 삶과 지식을 나누는 교류의 현장에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은퇴자들도 모여든다.


저자가 선택한 방식은 WWOOF와 Workaway였다. (Workaway는 WWOOF(우프)보다 뒤늦게 시작한 플랫폼으로 우프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 호스트와 연결이 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하루 4~5시간 동안 호스트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과 주말은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여행을 할 수 있다.


워킹홀리데이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을 받지 않고 일한다는 것과 교류를 기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WWOOF는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 교감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 가는 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익숙한 환경과 타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낯선 환경에 자신을 데려가 봄으로써 자신에 대해 더 명확히 알게 되고 한편으로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삶에 우리의 모습을 비춰봄으로써 위로를 받기도 하고 영감을 얻기도 하며, 시각을 교정해 갈 수 있다. 타인의 삶을 엿본다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을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보통 해외여행 하면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여행이나 자유여행 정도만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통해서 WWOOF라는 것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우프는 노동을 통해 숙식을 제공받으며 마치 현지인처럼 그들의 생활 깊숙히 들어가보는 여행이다. 저자는 오래된 집을 수리하고 알프스 산길을 오르고 시골 농장에서 일을 했다. 시간이 날때는 근처를 여행했다. 흔히 알고 있는 여행과는 많이 달랐지만 현지인과 함께 일하고 쉼을 즐기는 과정에서 마음의 치유와 힐링이 느껴졌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이유는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보이려는 우리의 타고난 본성, 즉 '허영'이라는 망령 때문이다. 외국어를 못하더라도 기죽지 않고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나의 있는 그대로를 내보일 수 있는 용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외 WWOOF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연대의식과 신용, 진실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세계시민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는 데에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이에 대한 그들의 준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언어의 문제는 직접 부딪히며 극복해 가는 과정도 있겠지만 출발전에 어느 정도는 미리 준비가 필요할 듯 하다. 그리고 안전에 대한 문제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호스트는 필요조건을 갖추고 정해진 규칙에 의해 검증을 받아야 자격이 주어지며 먼저 다녀간 우퍼들의 후기로도 호스트를 검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멀리서 날아온 낯선 외국인에게 아들딸들이 쓰던 방을 내어준다. 타인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확고한 철학이 없이는 호스트를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중간중간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함께 실려있다. 호스트가 정성껏 마련해 준 음식과 일을 끝낸 뒤 즐겼던 관광. 열심히 일하는 모습, 상상과 다르던 양치기까지..


몇 년 전 티브이로 보았던 '효리네 민박'이 떠올랐다. 물론 4~5시간의 노동이 의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효리 부부와 민박집 손님들 간에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어 보였다.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책 속의 이야기들과 겹쳐 보였다.


하루는 에르베가 내게 장작을 패는 일을 요청했다. 매일 잡초를 제거하는 일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던 터라 장착 패기는 반가운 메뉴였다. 하지만 막상 한 시간 정도 장작을 쪼개고 나니 팔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호기 있게 시작했건만 익숙지 않은 망치질은 내게 힘든 일이었다.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기다리던 토요일이 왔다. 노동 없이 쉬는 날이다. 전날 저녁에 에르베가 준 리용 관광 안내자료를 들고 리용 관광을 나섰다. 버스 정거장까지는 마티유가 차로 데려다주었다. 슈비네에서 리용까지는 자동차로 20여 분을 가는 거리다. 사실 나는 도시를 구경하는데 별 흥미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한가롭게 거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유유히 흐르는 론강을 따라 리용의 구시가지를 산책하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폴 투르니에는 '노동 없는 휴식은 휴식 없는 노동만큼이나 우리의 영혼을 파괴한다'라고 했다. 노동과 휴식의 균형을 잃어버린 삶이 지속된다면 정신적인 문제가 야기된다는 의미이다. 저자가 경험했던 프랑스에서 90일은 노동과 쉼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저자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이 아니라 좋은 감정과 결부된 기억과 관계라고 말한다. 수많은 풍경 사진보다 함께 웃으며 찍었던 눈 감은 스냅사진 한 장이 더 소중하다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런 소중한 순간들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힘내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르베와 마티유가 보여준 그들의 생활양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조금씩 엿보았던 삶에 대한 철학의 일면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유난히 말수가 적었던 그였지만 대화 말미에 "우리는 호스트와 우퍼로 만났지만 이제 친구가 되었다."라고 결심하듯 말했다. 그것은 선언처럼 들렸다. 실제로 그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친구처럼 대화하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앙드레의 어머니는 떠나기 전날 저녁 무렵에도 나를 찾아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깔끔한 옷매무새였다. 주름진 얼굴에 거동이 느렸지만 기품을 잃지 않은 인자한 모습이었다. "아들한테 들었는데 당신이 내일 떠난다고?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왔어. 그동안 내 얘기 많이 들어줘서 고마워"
"좋은 여행하길 바라요.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저자는 여러 가지의 노동을 경험했고, 사람들을 만났고, 정을 쌓았다. 서로 경쟁하듯 사진을 남기는 여행이 아닌 서로를 보여주고 소박한 삶을 나누는 여행을 했다. 그곳에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진솔함과 용기'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여준 삶의 여유를 보면서 애써 태연하고 강인해 보이는 연기를 하며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번 여행을 통해 은퇴 후 삶의 방향에 대해서 소신을 가지고 정립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바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태도로 전환해 가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
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해외여행이 보편화되고 SNS를 통해서 여행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기도 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자칫 진부한 이야기로 분류되기 쉬울 '여행 이야기'를 용기 내어 책으로 써내게 된 이유는 사실 단순합니다. 이 여행 방법이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결과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행성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참고가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새로운 기대를 품을 수 있기를 바라고 용기를 내서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WHOOF는 큰돈을 들이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멋진 방법이자 쉼이 있고 감동이 있고 관계가 만들어지는 그런 여행이었다. 서로 다른 시각에 대해 이해하고 꾸밈없는 삶에 대해 공감하는 기회였다.

저자처럼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경험해보면 좋을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언젠가는.. 남편과 함께 이런 여행을 한 번쯤 떠나볼 수 있기를 상상해본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소통하며 지내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저자의 말처럼 잠깐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닌 우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웃임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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