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에게 당장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될 죽음. 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마흔다섯, 한 남자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삶은
굉장히 단순했고
평범했으며
아주 끔찍하기도 했다.
"이것 좀 봐요!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대체 무슨 병이었답니까?"
"그런데 재산은 좀 있었나요?"
동료들이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이 죽음이 가져올 자신과 지인들의 자리 이동, 혹은 승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생전에는 그를 좋아했던 동료들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으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어'
일부는 장례식에 참석해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일은 성가시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한번 가보긴 해야 할 텐데요. 그런데 그 집이 이만저만 멀어야 말이지요"
법정에 들어설 때나 아랫사람들을 만날 때 그에게 향하는 예우, 상급자와 하급자들 사이에서 거둔 성공, 그리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 느끼는 뛰어난 업무 처리 능력, 이 모든 것이 그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와 함께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와 식사 자리, 카드놀이 등이 그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이반 일리치의 삶은 그가 기대한 대로 즐겁고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삶은 순조로웠습니다. 어릴 때는 집안의 자랑거리로 자랐으며 늘 유쾌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죠.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원하던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만족감을 채워줄 만한 귀족 가문의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습니다.
때론 결혼생활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동료들과의 식사 자리나 카드놀이 같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했죠.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그 어느 때도 자신이 이루어야 하는 목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봉급을 받기 위해,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연봉 5천 루블만 받을 수 있다면 관청이든 은행이든 철도 기관이든 마리아 여제 귀족학교든 하다못해 세관이든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5천 루블의 연봉을 받을 수 있고 그를 인정해 주지 않는 지금의 부서를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드디어 원하던 연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몹시 기뻤죠. 연봉 5천 루블 외에 3천5백 루블의 이사 비용까지 받게 된 그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할 생각에 기분이 좋습니다.
천장이 높은 고풍스러운 집을 마련하고 고상해 보이는 골동품과 그럴듯한 가구들로 집안을 꾸몄습니다. 직접 모든 것을 꾸미느라 분주한 이반 일리치는 사다리에 올라가 도배공에게 시범을 보이다 실수로 창틀에 옆구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겪게 됩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상황과 사람들을 향한 분노가 병을 악화시키므로 불쾌한 상황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그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말로는 자신에게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안정을 깨뜨리는 온갖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거슬린다 싶으면 버럭 화를 냈다.
처음에는 의사들이 자신의 병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하는 말은 그저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대수롭지 않았던 그날 사고 이후, 고통은 점점 심해져만 갑니다. 전혀 회복이 되지 않았죠. 결국 이반 일리치는 그 어떤 치료로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집안에서 홀로 고통과 싸우게 됩니다.
이반 일리치는 고통을 겪으며 공포와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화가 났죠.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가족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었지만 때론 자신을 아기처럼 돌봐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반 일리치는 그를 위로해 줄 보호막들을 찾았고 어떤 보호막은 잠시나마 그를 구원해 주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무너져버렸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 투명해졌다. 죽음은 어떤 것이든 통과했으므로 무엇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성공을 하면 좋은 일만 가득할 줄 알았습니다.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이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막상 그 위치에 올라가 보아도 만족은 없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그는 알아차리게 됩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것이 결코 행복이 아니었음을.
그 누구보다 외로웠던 사람. 가족에게도 동료에게도 진심의 위로를 받지 못했던 사람. 성공만을 좇으며 살아왔던 이반 일리치는 결국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은 철저한 고립이었습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인생의 허무함, 어둠, 고통에 대한 감정을 적나라하고 자세하게 펼쳐 놓습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철저하게 외로운 한 명의 사람일 뿐인 것이죠.
물질적인 풍요, 사회적인 위치, 성공, 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원하고 있지만 만약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답하게 될까요? 우리가 매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모든 순간들은 정말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 맞는 걸까요?
진정한 삶의 의미,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