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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갈순덕 Oct 01. 2024

세 여자를 지킨 열다섯 소년, 지금 어때요?

주사 있어도 애교 많고 박학다식한 우리 오빠

 금요일 밤, 엄마가 철야예배에 가면 오빠는 자기 뒤로 언니와 나를 줄 세웠다. 일렬종대로 줄을 서서는 온 집안을 돌았다. 방방마다 돌며 창문을 열고 닫고를 세 번, 창문 잠금쇠를 풀고 다시 잠그고를 세 번씩 했다. 마지막으로 현관문까지 똑같이 끝내야 우리는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데 자기 딴에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 싶다.      


 열 다섯 오빠는 우리 집 호주였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빠는 우리에게 본인이 받지 못한 것을 한풀이라도 하듯이 뭐든 다 해주셨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아빠는 좀 유별났다. 시내에 살았지만 우리 모두를 아빠가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로 입학시켰다. 학교는 집에서 차를 타고 30분가량이나 걸리는 데다 본인이 직접 등하교를 도맡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는 걸어서 5분.      


 시골학교였지만 오빠는 보이스카웃 활동이며 학생회장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인싸’처럼 자랐다. 오빠는 맨 앞에서 선서도 하고, 상을 받는 사진이 참 많았다. 그 많은 것을 오빠가 좋아했는지, 시켜달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랑 언니는 병설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누구 동생’이라는 말을 항상 들었다(하다못해 학교 소사아저씨도 엄마 친구였다).      


 그렇게 화려한 초등학교 시절을 넘어 오빠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아빠는 육성회장도 했다. 오빠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다. 오빠는 하루아침에 세 여자를 지켜야 하는 남자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오빠는 활동적이고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 싶다. 집으로 오는 학습지를 해서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으니, 동네 친구도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집으로 놀러 오는 친구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동생만 둘이니 운동장이나 놀이터에 가서 공놀이도 하지 못했을 테지.      


 그 옛날 우리는 농구대잔치를 참 열심히 봤다. 끝나고 나면 오빠는 언니랑 나를 데리고 집에서 농구를 했다. 하기 싫다고 하면 미리 점수를 몇 점 더 준다고 우리를 꼬셨다. 벽시계를 떼고 그 자리에 종이가방을 걸었다. 가방 바닥을 뚫으면 우리만의 농구 림이 되었다. 양말 두어개를 둥글게 말아서 공을 만들었다. 드리블은 입으로 “두둥두둥” 외치고(작게 하면 잔소리를 들었다) 언니랑 나는 서로 패스하면서 오빠의 블로킹까지 막아가며 열심히 했다. 


 “막내야, 너 저 강동희처럼 막 열심히 드리블을 하란 말이야!”     


 토요일은 학교 마치고 집에 와서 프로레슬링을 봤다. 워리어니 헐크호건이니 하는 선수들이 네모란 링에서 서로 치고받고 때리기 일쑤인 경기인데, 오빠가 참 좋아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가 끝나면 우리는 실전에 들어갔다. 두꺼운 솜이불을 두세 개 겹쳐서 깔고 경기장을 만들었다. 오빠가 최종 컨펌을 하고 나면, 우리 셋은 돌아가면서 선수도 하고 심판도 봤다. 한참 재밌게 놀다가 언니나 내가 울면 급히 경기를 멈췄다.


 “엄마한테 이르지 마”     


 오빠는 사춘기가 없었던 것 같다. 엄마가 가라는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집에서 가까운 국립대학교에 들어갔다. 심한 코골이라 고참에게 구박을 받았고,  무릎을 다쳐서 수술한 것 말고는 군 생활도 잘 마쳤다. 제대 후 바로 복학하는 대신 아르바이트로 엄마를 도왔고, 졸업하고는 하고 싶은 일 대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았다. 오빠는 호주제가 폐지된 뒤에도 항상 우리 집 호주로 살았다.      


 이제는 엄마 혼자 덩그러니 사는 집. 세상 까칠한 아랫집 아저씨가 밤낮도 없이 한동안 들이닥친 모양이다. ‘쿵쿵거리는 소리 때문에 힘들다’, ‘화장실 천장에 물이 샌다’, ‘왜 문을 쾅쾅 닫느냐’ 이유도 다양했다. 한참을 혼자서 머리 조아리다가 엄마는 오빠에게 털어놨다. 오빠는 수박을 한통씩 사서 아랫집이며 관리사무소에 찾아갔다. 일사천리로 집수리까지 서둘러 마치고 오빠는 관리사무소 앞에서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    

  

 몇 해 전에 신랑이랑 오빠랑 술을 한잔 했다. 신나게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오빠가 주사를 잔뜩 부렸다. 적당히 하면 좋으련만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새언니가 해외 연수를 나간 때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왜 저러나 싶었다. 엄마는 그날 한숨도 못 잤다. 


 “아, 그러게 오빠랑 왜 술을 마시고 그려!!”

 “지만 혼자 저러는 거야, 나는 괜찮잖아!”

 “늬 새언니가 그러는데 어쩌다 한 번씩 저런다더라. 쟈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억눌린 게 얼마나 많겄어”

 “지만 억눌려? 지만 그래? 우리 다 그러지. 암튼 인제 오빠랑 다시는 술 안 마셔!”     


 오빠는 우리 삼 남매 중에 유일하게 엄마에게 애교를 부린다. 욱하는 성질머리도 있어서 엄마가 눈치를 볼 때도 있지만 화를 냈다가도 금방 잘못했다고 아양을 떤다. 오빠는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제일 똑똑하고 박식하다. 아는 것도 많고 모르는 걸 물어보면 설명도 이해하기 쉽게 해 준다. 그리고 오빠는 세 여자를 온몸과 마음으로 지켜준 진짜 사나이다. 

대구 팔공산에서 삼남매 한 컷



잠깐이요) 출중한 미모를 겸비하고 글빨로 압살하는 #배지영 작가님으로 부터 첨삭지도 받아 완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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