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에 가장 반짝이던 순간은 고등학교 졸업 후 호주에서 working holiday를 하며 환경 보호 봉사활동을 하던 시절입니다.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봉사 활동에 지원을 했고, 10개월 동안 호주 여러 곳을 다니며 나무도 심고, 바닷가 계단도 만들고, 펭귄 밥도 주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소개 프레젠테이션을 이어 가고 있을 때, 상무님께서 갑자기 눈물을 훔치셨다. 면접에 참석하셨던 부장님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티슈를 가져오시고, 상무님께서는 주책이라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셨다.
난 속으로 "내 자기소개가 이 정도로 감동적이었나?" 어리둥절 해 하며,
그렇게 나의 첫 입사 면접은 끝이 났다.
미국에서 10년 동안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대기업에서 바이오산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에 국위선양을 하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힘겹게 약대를 졸업하고, 편안한 약사 생활이 보장되어있던 터라, 이 모든 걸 뒤로 한채 한국에서도 힘들기로 유명한 그런 곳에 취직하겠다는 막내딸의 통보는 부모님께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테다. 그래도 나의 합격 소식에 "이젠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어 좋다"라고 해 주는 가족들이 있어 한국에서의 첫 직장 생활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았다.
직장 생활은 쉽지 않았다. 업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미국 약대 졸업 타이틀로 경력으로 입사를 했으니 고운 시선이었을 리 없고, 말로만 듣던 '텃세'에 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했다. 누가 등 떠밀어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나의 결정이었으니 가족들에게 힘들다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 힘겨움은 내 실력이 쌓일 때까지 오롯이 내가 버텨내야 한다고 매일 다짐을 했다.
늘 배운다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열심히 하면 금방 괜찮아질 줄 았았으나, 실무에서 실력을 쌓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필요했다. "내가 잘못된 결정을 한 걸까? 미국으로 돌아갈까?" 힘없이 어깨가 축 늘어져 있던 어느 날, 상무님께서 내게 말을 걸어 주셨다.
태도가 인생을 결정한다.
"내 나이쯤 되면 말이지, 아랫사람들의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무리 자기가 경력 많고, 잘났다고 하는 사람도 별반 차이가 없어. 근데 말이야.... 결국 나중에 인정받는 사람은 "태도"가 달라. 그 사람의 "attitude"가 결국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거야. 난 자네의 태도가 맘에 들어."
내가 입사한 지 2년이 조금 지나지 않아 상무님은 다른 곳의 대표님으로 발탁되어 회사를 떠나셨다. 그 이후에도 상무님은 나의 성장을 멀리서 지켜봐 주고 계신다. 내감춰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는 대나무 숲과 같은 존재, 서로의 삶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는.
회사가 아닌 밖에서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내가 물었다. "상무님, 근데 제 면접 때 왜 우신 거예요?" 상무님께서 수줍게 웃으시며, "그때 내가 면접 들어가기 전에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울음이 터진 거야. 사실 부끄러워서 너를 뽑지 말아야 하나까지 생각했다니까...." 이제 우린 숨겨놓은 속마음까지 다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난 벌써 이 곳에서 7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 회사의 초창기 멤버이자, 가장 오래된 임직원 중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버텨 낸 시간들이 나를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길. 내가 포기하려는 그 순간, 내 손을 잡아준 상무님은 그 세월 동안 여전히 내 든든한 지원군이자 멘토로 자리 잡고 계신다.
"내가 너무 많은 일들을 겪고, 상처 받다 보니 요즘엔 사람들에게 정을 많이 안 주게 돼. 적당한 거리가 좋은 것 같아. 그래도 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은 곁에 두고 싶어."라며 상무님은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셨다. 조말론 향수였다.아무런 날이 아닌 보통날이었기에 더 놀랐던 걸까. 아직 지난번 주신 디퓨져의 향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난 늘 받기만 하는 '못난 사람' 같아서 기쁜 마음보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