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se Apr 05. 2022

살아가도록 해요.

-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알게 된 건 <해피 아워>(2015)를 통해서였다. 아무리 영화가 좋다한들 328분에 달하는 영화를 어떻게 보나 걱정하며 극장에 들어갔는데 웬걸, 5시간 반이 체감상 한 2시간 정도로 느껴졌던 게 기억이 난다. 


진작에 보고 싶었던 <드라이브 마이 카>를 드디어 봤다. 커다란 사건 없이도(혹은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를 켜켜이 쌓아가는 감독의 장기가 이번 3시간짜리 영화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조곤조곤 해 나가는 느낌.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설득당하는 기분. 그리곤 충만해지는 마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동명의 단편 소설을 베이스로 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설정 외에 많은 내용이 다른, 거의 새로운 영화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의 중요한 줄기, 이를테면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는 점, 그리고 타인이나 삶에 대한 주요한 몇몇의 대사 등은 영화에 오롯이 남아 있다. 감독이 소설에서 '꽂혔을' 어떤 지점을 정교하게 갈고닦아 영화로 탄생시켰다. 



- 각자의 이야기,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


영화의 인물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가후쿠, 미사키, 연극제 코디네이터 윤수(진대연)와 그의 아내 유나(박유림)),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가후쿠의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 또는 직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이 된다(가후쿠, 유나 등 영화 속 연극배우들). 이들 모두는 스스로 배우이거나, 연극 무대를 돕는 사람-코디네이터-이고, 심지어 오토의 이야기에 매료됐던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는 허구가 아닌 실제 이야기-뉴스-의 주인공이 된다. 연극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던 미사키도 연극 리허설을 보고싶다고 말하고 야외무대에서 두 여자 배우가 하는 연기에 빠진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 사진출처: NYCultureBeat.com, Screen Daily.com


- 타인을 바라보는 것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드라이브 마이 카>,『여자 없는 남자들』51쪽)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경유해 도달하고자 하는 건 타인을 이해하는 것, 결국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가후쿠는 다카츠키가 들려주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사키의 고향과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깊은 마음을,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는 마음을 비로소 응시한다. 미사키 역시 오가는 자동차 안에서 가후쿠의 아내가 녹음하고 가후쿠가 대사를 읊는 그 이야기, 연극제 리허설 속 <바냐 아저씨>를 경유해, 그리고 가후쿠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다시금 대면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후쿠는 자신의 아내를, 미사키는 자신의 엄마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죄책감과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이야기를 경유해, 타인을 경유해 자신의 마음에 도달하게 되고, 이는 반대로 자신을 경유해 다시 타인에게 가 닿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으로 올리는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수어 등 서로 다른 언어로 구성되는 것 또한 타인에 가 닿는 것의 어려움을, 다시 말하면 언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 살아가도록 해요. 

영화의 엔딩 그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엔딩이 관객에게 가닿기 위해서는 그 앞에 쌓아놓은 이야기와 이미지, 분위기 등등 모든 것들이 마지막에 쾅, 하고 불꽃을 피워야 하고, 이런 영화를 우리는 '좋은 영화'라고 말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엔딩이 그러한데, 특히 그것이 수어 연기로 발할 때 아름다움은 곱절이 된다. 


사진출처: Bullfrag.com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 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드라이브 마이 카>, 『여자 없는 남자들』, 59쪽)


가후쿠와 미사키는 서로의 상처를 알게 된다. 아내의 외도와 죽음, 엄마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자책과 슬픔. 하얀 설경 속 영화의 엔딩은 '삶은 계속된다'라는 익숙한 어구가 관객에게 가닿는 장면이다. 영화는 조용히 보여준다.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깊이 알 때야 비로소 위로받을 수 있고 또다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덧1. 영화의 언어가 국제적으로도 가닿은 까닭인지,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덧2. 유나를 연기한 박유림 배우가 나에겐 이 영화의 또 다른 발견이었다. 수어가 참 아름답다고 새삼 또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조’의 뮤지컬 영화 - <아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