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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Feb 26. 2018

<1987>, 죽음의 이미지에 관한 생각

- 이야기와 이미지의 관계


기대 반 의심 반. 대중의 기호를 맞추어야 하는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비극적 역사를 재현하는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이 두 가지 마음을 품게 한다. <1987>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우려와는 달리 영화를 보며 많이 놀랐고 또 슬퍼 울었다. 


두 가지 지점 때문이었다. 


1.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인,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정면돌파로, 그것도 엄청난(?) 두 명의 배우로 재현한다는 점. (어떤 글을 통해 그 두 배우의 존재를 먼저 알고 영화를 봤는데, 그게 영화에 대한 놀라움과 재미를 얼마나 반감시켰는지 알게 됐다. 그런 정보를 *스포주의(!) 표시도 없이 누설해버린 필자에 화가 났던 경험 때문에, 혹시나 이 글을 먼저 볼 수도 있을 누군가를 위해 배우의 이름은 글에서 끝까지 밝히지 않으려 한다.)


2. 에필로그 이미지의 강렬함. 실제 장면을 담고 있는 영상 푸티지는 그 자체로도 힘을 지니지만, 이전까지 쌓아 올린 픽션의 이미지로 인해 더욱 강력한 에너지를 분출한다는 점.  



정면돌파의 이미지


영화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감독이 정말 대담(!)하다는 거였다. 물론 영화가 기획되던 시기가 박근혜 정권 때였음에도 이런 영화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87년 당시 두 명의 굵직한 실존 인물의 죽음을 이미지로써 재현해 내는 감독의 태도 때문이었다. 


역사 속에서 죽음을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윤리적 비판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첨예한 사안이다. 영화가 죽음을 이미지로 재현할 때, 그것은 쾌감을 주는 스펙터클로써 관객에게 소비되고 소멸하는 이미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미지가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과 연관되면, 그 이미지는 하나의 허구적 이미지로 소비되어 사라져 버리고, 현재의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되기 십상인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미지. 


<1987>은 아직 우리에게 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는 영화이고,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민주주의에 관한 영화이기에, 쉽지 않은 어떤 결단이 감독에게 필요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87년 민주항쟁은 절반의 승리이고, 그 시절에 대한 많은 이들의 부채감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87년 6월을 있게 한 두 명의 직접적 인물을, 그들의 죽음의 그 현장을 담아낸다는 것. 보고 그냥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각인될 수 있는 이미지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정면돌파하거나 아니면 상징으로, 또는 암시 같은 것으로 표현하거나.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장준환 감독은 과감히 전자를 택한다. 특히나, 사진 이미지로 너무나 많이 봐왔던, 머리에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같은 학교 학생이 부축하는 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해내는 선택은 정말 놀라웠다. 와, 이 감독 정말 대담하다! 



다행히도 '그' 이미지들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이전까지 당시의 상황을 다양한 인물과 서사로 겹겹이 쌓아감으로써 죽음의 이미지가 설득력과 힘을 얻기 때문이다. 많이 이야기되듯이, <1987>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는 한 두 명의 굵직한 주인공을 따라가며 그들의 영웅담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닌, 검사, 의사, 기자, 교도관, 신부, 그리고 평범한 대학생 등 민주화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양심을 지키며 작은 행동을 했던 사람들을 골고루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한 명 한 명의 인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쌓아가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아마 그 두 개의 죽음의 이미지가 영화 말미에 배치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 죽는 직접적인 이미지를 전반부가 아닌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배치한다. 한 줌 한 줌의 인물과 이야기가 모이고 쌓여가는 영화의 구조 덕에 마지막 죽음의 이미지들이 단순히 영화의 어느 지점에서 폭발하는 스펙터클이 아닌, 영화 사이사이 하나의 '마디'로써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택시운전사와 해외 취재 기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종의 '영웅적 서사'를 쌓아가다가 마지막 카체이싱 장면의 스펙터클과 송강호의 눈물 연기로 폭발하는 <택시운전사>와 <1987>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987>에서는 한자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대배우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고 퇴장하기를 반복한다. 오히려 이 영화의 스펙터클은 그 각각의 날갯짓이 모여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는 순간을 상징화하는 이미지, 그러니까 영화의 말미 김정남(설경구)을 잡기 위해 습격한 교회에서 박처장(김윤석)이 마주하게 되는 신의 형상과 십자가 첨탑 주위를 나는 비둘기 등의 이미지이다. 



에필로그의 강렬함


나는 마지막에 가장 많이 울었다. 연희(김태리)가 광장에 세워져 있는 버스에 올라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끝나고, 당시의 시위현장, 이한열의 영정사진, 문익환 목사의 절규 등, 이제까지의 픽션의 이미지가 아닌 다큐멘터리로서의 푸티지 영상이 크레딧과 함께 등장한다. 내 경우는 거기에서 뭉쳐있던 감정이 터져나왔다. 


픽션과 논픽션 이미지 사이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에필로그 이미지의 강렬함은 <1987>이 픽션의 이미지와 서사를 가능한 한 현실에 가장 가깝게 다루고자 노력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충돌하여 튀는 대신에, 이제까지 일구어 온 이야기 속으로 스며든다. 거시적으로 광장을 조망하는 마지막 이미지 속, 광장으로 나온 수많은 인물들은 이제껏 <1987>이 그려온 다양한 주조연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택시 경적을 울리는 운전사, 사무실에서 튀쳐 나오는 직장인, 연희같은 대학생 등,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은(픽션) 이한열 열사의 추모제에 모인 실제 영상 속 수많은 인파(논픽션)와 겹친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실제 영상 속의 인물들과 겹치는 순간,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 이미지(픽션)는 설득력을 얻는다. 그것은 단순히 허구의 이미지로 인식되는 대신, 실제적 사건으로 각인된다. 영화의 이 이미지가 튀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극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이미지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의문이 남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물속에서 죽어가는 박종철의 얼굴을,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의 모습을, 그것도 굳이 슬로모션으로 재현해야 했을까, 뭐 그런 의문은 남는다. 그 이미지는 관객으로 하여금 87년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 


영화 외적으로 또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 영화가 2016-17년의 촛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1987>이 영화 자체에서 멈추지 않고 외부로 확장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는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모였던 최근의 촛불의 경험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987>의 죽음의 이미지에 대해 조금의 우려를 덜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이런 영화 외적인 맥락과 맞닿아 있다. 





2018. 2. 24, 서울아트시네마 / <1987>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앞에 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그 죽음의 이미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는 걸 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감독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지난 2월 24일에 갔던 서울아트시네마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물어봤으면 좋으련만. 다들 어찌나 질문이 많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장준환 감독의 전작인 <지구를 지켜라!>(2003)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를 떠올렸다. 개인의 심연을 끝없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B급 감성을 맘껏 분출해왔던 감독. 그 죽음의 이미지에 대해서 속 시원히 듣지는 못했지만, 짐작컨대 뭐가 되든 끝까지 밀고 나가보자, 그런 감독의 고집이 이 영화에도 담긴 게 아닐까 생각해봤다. 



*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생각을 전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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