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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02. 2018

절반의 진실, 절반의 봉합 - <플로리다 프로젝트>

“리얼리티 같은데 아니네.” 영화를 본 뒤 남편의 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는 인물의 뒷모습을 핸드헬드로 따라가고, 아이들이 아닌 한 되도록 멀찍이서 인물들을 바라보며, 자극적인 장면은 절제하거나, 씬을 쌓으며 에둘러 표현하는 선택을 한다. 예컨대, 영화의 초반 '매직캐슬'에서 한 여성이 매니저 바비(윌렘 데포)에 의해 쫓겨나는 에피소드가 영화의 후반부 무니(브루클린 프린스)가 목욕을 하며 인형과 노는 여러 컷들과 연결되는 식이다. 감독의 전작인 <탠저린>(2015)에서 인물을 황급히 쫓는듯한 흔들리는 카메라처럼,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는 영화를 ‘리얼리즘’의 영역 안으로 넣으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말은 1965년 디즈니가 테마파크를 건설하기 위해 플로리다주 올랜도 지역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계획에 붙인 가칭이라고 한다. 1971년 개장 이후 세계 최대 관광지 중 하나가 된 이곳 주변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졌을 모텔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영화 속 하나의 에피소드로도 등장하듯,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아마도 '매직캐슬'이라는 이름 때문에) 예약을 잘못하고 실수로 오는 사람들뿐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디즈니월드 내 값비싼 리조트로 향하고, 모텔들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집을 잃은 사람들이 사는 '숨은 홈리스'들의 공간이 된 것. 프로듀서인 크리스 버고흐가 2011년 디즈니월드 근처 고속도로에서 놀던 아이들을 보고 감독인 션 베이커에게 이야기한 것이 이 영화의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영화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아이의 시선으로, 플로리다의 맑고 화창한 날씨와 알록달록한 모텔 건물들과 함께 진행되는 영화를 그 자체로 경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영화의 톤이 좋고 엔딩 장면은 두 번을 봐도 눈물이 날 정도로 좋다. 그 자체로는, 그렇다.


하지만, 유년시절이라는 것이, 아이의 시선이라는 것이, 어떤 환경에서든 이런 보편성을 지닐 수 있을까. 무니와 젠시(발레리아 코토), 스쿠티(크리스토퍼 리베라)는 언제까지 티 없이 관광객들에게 잔돈을 받아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먹을 수 있을까. 무니의 눈물이 영화의 끝이 아니라, 무니와 젠시가 디즈니월드로 숨어드는 장면(이게 과연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까지 잇는 감독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언제까지고 아이일 수 없고, 언제까지 동화의 나라, '매직 캐슬'에 숨어살 수만은 없다는 사실 앞에서 영화는 멈추어 서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아동보호국에서 온 직원은 무니에게 "잠깐 동안만 다른 가족한테 가는 것"이라며, "넌 정말 강한 아이"라고 말한다. "알고 있니?"라는 물음에 무니는 "아니"라고 답한다. 사실상 '강한 아이'라는 말은 어른의 시선에서 비롯된 말이다. '네가 지금 있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너는 꿋꿋이 자라고 있구나'라고 하는. 하지만, '이런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 무니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걸 인식하는 순간, 무니는 어른들이 보는 것과 같은 '강한 아이'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강함'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지거나 혹은 강요된 것일지도 모르고, 그 강함의 정서가 자라나고 또 어느 순간 왜곡될 때 그녀는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도,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거리낄 것 없는 무니의 엄마도, 친절을 베풀 수는 있어도 그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매니저 바비도, 감독 조차도, 어떤 어른도 무니를 책임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가장 친한 친구 젠시만이, 무니의 세계를 구한다(젠시의 세계를 구하는 것도 역시 무니뿐이다). 무지개 너머를 상상하거나, 쓰러져도 계속 자라나는 나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둘뿐이다. 어른들은 책임과 선택을 방기하고, 영화는 마치 그 선택을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양 말하고 있다. 물론, 아이들은 마냥 수동적이지 않으며 고유의 세계와 능동성을 갖지만, 그로써 어른들의 무책임함에 면죄부를 주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 침대에는 빈대가 들끓어도 보랏빛으로 건물을 칠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아이의 덧없는 시선으로 관객을 유혹하고는 그 천진난만함으로 현실을 덮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무니의 엄마 핼리가 스쿠티의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스쿠티의 뒤에 있고 스쿠티가 그 장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알아챌 듯 말 듯, 스쿠티는 몸을 살짝 움찔댈 뿐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스쿠티가 목격하는 폭력의 장면.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처참하고 불안한 이 장면이, 아이들이 직면하는 진짜 세계는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불안불안했다. '매직 캐슬' 옆 빈 건물에 화재가 나고, 아이들은 고속도로를 뛰어다니고, 아이들도 매니저 바비도 장난처럼 총 쏘는 시늉을 하는 장면들. 영화를 마냥 어둡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여정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감독이 영화의 톤을 유지하면서도 관객의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으리라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런 몇몇의 장면들이 일종의 맥거핀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한편 안도하다가도 또 한편 이상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답고도 쓸쓸한 정서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이 영화를 싫어하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의 사랑스러움만으로도 충분한 영화니까. 하지만 영화를 보고 영화사에서 마련했다는 '쇼룸'을 마음껏 볼 수는 없었다. 영화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성취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절반의 진실을 영화로 봉합해버린다고 해야 할까. 복잡한 마음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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