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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Sep 21. 2018

배우 키키 키린을 추모하며

- 그녀의 연기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어느 가족>(2018)에서 유독 쇠약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닷가 장면에서 “아우~ 이 검버섯 좀 봐~” 익살을 부리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다들 고마웠어.”


바닷가에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이 대사는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가 아닌 현장에서 키키 키린이 즉흥적으로 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남기고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내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촬영 첫날 즉흥적으로 본인이 한 거다. 현장에서는 눈치 못 챘었는데, 편집실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입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들 고마웠어'라는 대사였다"면서 "영화 안에서는 하츠에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인데, 원래는 아니었다. 그 말이 마지막쯤 나올 수 있게 시나리오를 수정해갔다"고 밝혔다.


http://sbsfune.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E10009211041


1943년 도쿄 출생인 그녀는 60년대 18세의 나이로 분가쿠자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고, 70년대는 TV 배우로 인기를 끌다가, 80년대에는 스즈키 세이준, 시노다 마사히로, 이치가와 곤 등 유명 감독들과 영화 작업을 했다. "다른 일을 찾을 수가 없어서 연기를 시작했다"는 그녀는, 자신의 연기 인생 중 45년은 "살기 위해" 연기를 했고, 그 이후에야 영화가 자신의 열정과 중심이 되었다고 밝혔다. "예전 영화에서는 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면서. 


https://www.scmp.com/lifestyle/film-tv/article/1928233/kirin-kiki-everyones-favourite-japanese-screen-grandmother


따져보면 그녀가 영화에 진정으로 열정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시기는, 2004년 유방암 판정을 받은 즈음인 것 같다.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2007)나 <걸어도 걸어도>(2008),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 등 키키 키린을 강렬하게 기억하게 하는 영화에서 그녀는 암과 싸우면서 연기 활동을 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영화를 통해 키키 키린 할머니를 알게 되었을 때는, 아픈 몸을 이끌고 가장 열정을 쏟아부어 연기를 하던 때였던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태풍이 지나가고>를 발표했던 2016년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키키 키린은 정말 내 어머니 같았다”고 말한 것처럼, 그녀는 한 없이 맑은 엄마이자 어느 순간 한 없이 냉정한 얼굴을 내비치기도 하는 인간이었고, 나는 그 연기를 정말 좋아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1260


<어느 가족>에서의 모습도 좋았지만, 특히 <걸어도 걸어도>에서의 키키 키린을 잊지 못한다. 유머와 따듯함이 가득하지만, 아들 대신 살아남은 아이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차가운 말을 내뱉을 때의 표정과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젊은이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삶의 생사고락을 뚫고 온 자의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태도, 그러면서도 증오할 상대가 있어야만 고통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약한 인간의 면모를 가진 사람. 그녀의 연기를 그 누가 대체할 수 있을까. 아마,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


"암이 온몸에 퍼졌고 의사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스스로 건강한 자신과 비교하면서 끔찍해해 봐야 소용없어요. 현실에 맞서기보다는, 내 앞에 놓인 것을 받아들이고 흐름에 맡기려 합니다."


https://www.japantimes.co.jp/culture/2018/09/16/films/veteran-japanese-actress-kirin-kiki-dies-75/#.W6TZdWgzZPZ



키키 키린 배우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이야기는 그녀의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1.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크랭크 인 전날 감독에게 했다는 말. 

"감독도 알겠지만 어른 장면이 조금 많은 것 같아. 이 이야기, 어른은 배경이니까. 그리고 다들 배경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니까, 클로즈업 촬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


2. <태풍이 지나가고> 개봉 후, 중국 기자에게 그녀가 했다는 말. 

"<태풍이 지나가고>는 그렇게 큰 스케일의 영화도 아니고 가장 생생한 이야기도 아니어서, 아무도 보러 안 갈까 봐 걱정입니다. 작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면 괜찮지만, 지금 고레에다 감독은 너무 거장이라 영화가 다 큰 영화관에서 상영되는데, 이 영화는 거기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 막판에 키키 키린은 기자에게 영화를 봤느냐고 물었고, 기자가 안 봤다고 하자, "기대치를 낮추세요."라고 조언했다고. 


3.  키키 키린이 일본 '아사히 신문'을 통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 당시 키키 키린은 메시지를 친필로 적은 후, 자신의 얼굴 그림과 함께 팩스로 보냈다고 한다.


“옛날 책을 읽으면 대체로 똑같은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자살한 (사람의) 영혼은 살아 있었을 때의 고통에 갇히게 된다고요. 그게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은 하지 말자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이 또한 재미있잖아요.”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b9ef367e4b04d32ebf99d8a


4. 키키 키린은 예전에 있던 매니저가 죽고 난 뒤, 매니저나 에이전시 없이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무미건조'하게 이야기한다고. 






역할이 많든 적든 그녀의 연기를 사랑했는데, 그 연기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과, 봤지만 또 보고 싶은 영화들을 다시 챙겨보아야겠다. 

 

부디, 하늘에서 평안하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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