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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Oct 28. 2018

선의라고 해서 다 괜찮은 것은 아니다

- <봄이가도>는 누구를 위로하나

영화가 세월호를 다루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다이빙벨>(2014), <그날, 바다>(2018) 같은 다큐멘터리가 몇 있었지만 영화 자체보다는 '블랙리스트'나 '음모론' 같은 영화 외적인 것들이 이슈화되었다. 영화는 성기고 사건에 대한 의혹은 있지만 그뿐이었다. 이렇다 할 원인 규명이 되지 않았고 한두 명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노력으론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실규명이나 세월호를 기억한다고 하는 어떤 '대의'에 의해 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처럼 느껴졌다. 이 다큐멘터리들은 굳이 영화가 아니라 방송이어도 됐을 거다. 여전히, 영화가 세월호를 '제대로' 다루기는 이르다고 느껴진다. 



<봄이가도>(2017)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우려가 됐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세월호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옴니버스 영화라고 했다. 출연 배우 중 한 명이 라디오에 나와 배우로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DJ는 도중에 울음을 터뜨려 진행이 잠시 멈춰졌다. 세 명의 감독은 같은 대학 영화학도이고 비슷한 문제의식 속에서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선의가 느껴졌다. 


마음 한편으론 '봐야지'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뜻 행동이 가지 않아 미루고 있다가 최근에 기회가 생겨 영화를 보게 됐다. 적어도 세월호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나 자극적인 이미지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약간의 우려와 함께.




선의가 모든 것을 무마시켜주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고 힘들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딸이 돌아온다는 날 들려오는 문소리와 문으로 다가가는 카메라 워킹의 긴장감이 불편함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표현하는 장면들은 차마 제대로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감독은 주인공이 드럼 세탁기에서 환영을 보는 초반 장면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밤중 자동차 안에서 주인공이 다시금 경험하는, 자동차 창문에 툭툭툭, 찍히는 손자국으로 영화를 스릴러로 만든 뒤, 기어코 (뒷모습만이긴 하지만) 그 날 물속에 남겨진 누군가의 이미지를 집어넣는다. 


다급하게 창문을 치는 소리와 여러 개의 손자국을 재현하는 장면이 나에게 공포이고 불편했던 것이 내가 그 날의 기억을 회피하려는 때문인가 하고 잠깐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떠나서, 과연, 유가족들이 그 장면들을 본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알지 못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마지막 순간을 괴롭게 상상하고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과연 그들에게 위로가 될까. 그 장면들은 '영화적'인, '극적'인 어떤 장면을 위한 감독의 욕심은 아닌가.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실재'적인 괴로움의 표현이라고 해도 말이다. 


평범한 대사나 스토리, 왜 아내는 꼭 '김치찌개' 같은 걸로만 호명되는지, 그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누군가의 선의와 나이브함에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상처 받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게 했다. 이 영화에 정말 사람들이 위로받는지 궁금했다. 이 영화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위로하는 것일까.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일반'의 사람들을 정말 세월호를 다룬 이 영화가 위로할 수 있는 건가. 이건 너무 과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아우슈비츠를 다루는 어떤 영화가, 예컨대 '죽음의 공포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건가.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는 각각의 주인공들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을 이야기한다지만,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하는 묵언의 폭력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수많은 질문이 맴돌았다.




<그날, 바다>의 마지막 장면을 봤을 때 경악의 감정이 들었다. 세월호 침몰의 의혹을 설파하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영화의 마지막에, 로이킴의 <봄봄봄>이 흐르면서 누군가의 휴대폰에 남겨져 있던 단원고 여학생들의 발랄한 모습이 동영상으로 흘렀다. 이 이미지와 음악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조금 심하게 말하면 영화가 자신의 주장에 심정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그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을 추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카포>라는 영화에서 엠마누엘 리바가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쇼트를 보자. 감독은 마지막 앵글에서 여인의 축 늘어진 손을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주검이 된 여인을 로우 앵글로 프레임 속에 다시 잡으려 트래킹인을 하고 있다. 이렇게 결정한 이 감독, 이 인간은 최고로 경멸을 받아 마땅한 자이다.


자크 리베트 <천함에 대하여> 中/ 세르쥬 다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유대인 수용소를 다룬 영화 <카포>에 대한 자크 리베트의 비평, <천함에 대하여>를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감명을 기억한다. 이 문구는 바이블도 아니고 정언명령 같은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는 당시 영화를 공부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어떤 사건은 '슬픔 일반', '상처 일반'으로 퉁 치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겁다. 의도가 그렇지 않다 해도, 그것이 선의라고 해도 다 괜찮은 것은 아니다.  언제가 이르지 않은 때일지 모르지만,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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