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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Feb 15. 2018

오즈의 서늘한 차가움에 대하여

몇 편의 후기작에 대한 단상

많은 이들이 그렇듯, 오즈를 처음 알게 된 건 <동경 이야기>(1953)를 통해서였다. 이후 <부초>(1959)나 <안녕하세요>(1959) 같은 작품을 간헐적으로 보면서 때로는 프레임의 낯설음을 느끼기도 하고, 일본 특유의 예의를 차리는 정서나 뚜렷한 성 역할 등에 불편해 하기도 했다. 다다미숏, 180도 가상선을 무시한 시선의 불일치 등 오즈의 미학을, 그렇네, 재밌네, 하면서 배우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게 오즈영화의, 특히 처음 <동경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영화의 진수는 풍경숏과 공간숏이었다. 서사를 중지시키는 역할, 특정 공간을 조망하는 역할 같은 기능적인 의미 외에, 그것이 영화의 어떤 지점에,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느냐에 따라 관객의 정서에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동경 이야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과 후의 도쿄, 오노미치의 풍경은 같은 프레임이지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복잡한 내러티브랄 것도 없이, 풍경과 텅 빈 공간의 몽타주로 오즈의 영화는 엄청난 감정적 풍부함을 지니게 된다. 오즈는 감정이나 드라마의 과잉이 아니라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과 정물, 풍경, 공간을 통해 정동을 이끌어내는 감독이다. 


그 정도의 매료. 


<동경 이야기>(1953)


그러다 최근 다시 보게 된 오즈의 몇 편의 영화들. 주로 50년 전후의 후기작들이었다.


홀로 남을 아버지를 걱정해 시집을 미루는 딸과 그런 딸을 시집 보내려는 아버지의 이야기, <만춘>(1949). 

쳇, 구식이야, 하고 생각하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가 사과를 깎다 고개를 떨구는 마지막 장면에서 항복하고야 말았다. 눈물이 주루룩. 이미지의 대칭적 구도, 플롯과 플롯 사이 휴지기처럼 등장하는 텅 빈 공간과 시간.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배치 속에서의 커다란 차이 등을 통해 쌓여가는 어떤 정서가 갑작스레 분출되는 경험이었다.  


오즈의 첫 컬러영화인 <피안화>(1958) 역시 비어있음의 이미지가 어떤 정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물론, 빨강-노랑의 옷과 장미꽃 배열, 빨강-초록-노랑의 빨랫감 등, 색감을 통한 유희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 외에도 상투적인 말들과 평범한 상황 속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작은 유머, 미묘하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인물들의 감정이 오즈의 영화를 비범하게 만든다. 


다시 본 <안녕하세요>의 아이들은 여전히 귀여웠고, 치밀하게 계산된 미장센과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리듬은 어른들이 인사처럼 주고받는 '좋은 날씨네요'라는 대사처럼 맑고 경쾌했다. 


<피안화>(1958)


그랬다. 오즈는 때론 쓸쓸하기도 하고, 영화 속에서 죽음을 다루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온화하고 유머가 있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은 평범한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내는 감독처럼 보였다.



 <동경의 황혼>(1957)을 보기 전까지는


이 영화는 좀 이상했다. 담배를 손에 낀 채 턱을 괴고 있는 그 유명한 포스터 이미지. <피안화>에서 아버지의 말을 끝내 거역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 아리마 이네코의 또 다른, 너무도 서늘한 영화. 


급작스러운 죽음, 역시 급작스러운 일상으로의 전환. 사건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그러니까 죽음이라고 길게 다루지도, 사소한 일이라고 가볍게 다루지도 않고 모든 이야기들을 평등하게 다루는 잔인한 연출. 집 나간 엄마도, 죽은 오빠에 대한 이야기도, 아키코(아리마 이네코)의 임신과 낙태수술도, 사고와 죽음도, 이 엄청난 사건들을 사소히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몹시도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남성들의 무심한 폭력이 어떻게 한 여성을 죽여가는지를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또 무심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특히나, 다시 화만 내는 남편에게로 돌아가겠다 결심하는 타카코(하라 세츠코)와, 딸의 죽음에도 오랫동안 못 먹은 ‘밥’을 주문하며 다시금 일터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버지를 담는 엔딩 장면은, 더구나 정말의 일상인 것처럼 흐르는 경쾌한 음악은 적잖은 충격과 (심지어) 분노를 안겨준다. 언니인 타카코가 자식들을 버린 어머니에게 아키코의 죽음을 알리러 가는 이전 장면에서의 충격만큼이나 끔찍하게 강렬하다. 


<동경의 황혼>(1957)


49년작인 <만춘>과 58년, 59년작인 <피안화> <안녕하세요>와 같은 영화 사이에 왜 <동경의 황혼>은 자리하고 있나. 오즈가 당시 일본에서의 실제 여성의 상황처럼 영화 속 여성들에게 '가혹'했지만, (그리고 남성들에게는 연민을!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오즈의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왜 그 가혹함을 이토록 밀어붙였던 것일까. 


내게 이 영화 이후로 오즈의 영화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즈의 차가움이, 표면적인 온화함 뒤에 남겨진 잔인한 슬픔과 서늘함이 먼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경 이야기>의 류 치슈는 이후 어떤 작품보다도 늙어보인다. 당시 50대도 아직 되지 않은 그가 히끗한 머리와 둥근 안경, 구부정한 포즈로 시간을 먼저 살아내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자식들은 애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생각이 없고, 그저 유품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 살아야 할 삶이 있기 때문"이라며, 오즈는 하라 세츠코의 말을 빌어 단념의 태도를 취한다. 그것이 인생의 잔인함이라고 말하는 듯이. <안녕하세요>에서는 아이들의 경쾌함과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동선의 리듬 등에 주목하던 것에서, 뒷담화나 배제의 원리로 공동체를 유지시키며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도 집중하게 된다. 


처음엔 오즈의 후기 작품들의 특징인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거의 보지 못해서 그렇게 추측했는데, 비교적 초기(혹은 중기)작에 속하는 <도다가의 형제자매들>(1941)에서도 역시, <동경 이야기>보다 조금 더 '해피 엔딩'이긴 하지만 유사한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자기 가세가 기울고, 갈 곳 없는 어머니와 딸은 시집, 장가간 언니 오빠들의 집을 전전하는데, 이들을 대하는 가족들의 냉정함이 바로 그 서늘함의 원인이다. 


<동경의 황혼>은 유독, 더 냉정하고 차갑다. 아키코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영화 내내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버린 어머니, 남자친구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 자신 역시 뱃속의 아이를 버리고 만다. 다시 새롭게 살아갈 의지가 생기는 순간에도 영화는 그녀에게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유독, 왜 그렇게 한 것일까. 



1903년생인 오즈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했고, 전쟁 중에도, 패전 후에도 계속 영화를 찍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런 배경이 그의 영화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일본적인 것'을 영화로 담아내고자 했고, 시대적, 정치적 배경 같은 다른 것은 걷어 낸 체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적인 것'을 찍었다. 얼핏 내러티브적으로는 평범해 보이고 부드러운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오즈는 누구보다 냉정히 영화를 찍었던 게 아닐까 싶다. 오즈는 생전에 일본 영화계로부터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감독으로 저평가받았다. 패전 이후 새로운 영화가 등장하는 와중에도 그는 고집스레 자신의 영화를 찍었다. 그건 당시 충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비슷한 영화를 찍었다. 나는 그의 이런 고집스러움이 영화의 서늘함과 닮았다고 느낀다. 당시 일본의 불편한 모습도, 삶의 잔인함도, 일상의 따듯함과 웃음과 함께 버무려져 있다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 그것이 때로는 <동경의 황혼> 같은 모습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 일본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한 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오즈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의 어떤 작품들이 오즈를 닮은 구석이 있다면, 그건 영화에 따스하고 아련하고 ‘착한’ 정서가 흐르다가도 돌연 무섭도록 차가워지는 영화의 온도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2004)의 서늘함을 생각해보면 된다. 누구보다 발랄하지만 어느새 고립되어 죽음으로 치닫는 아이들의 모습을. 영화의 시작과 함께 경쾌하게 등장하지만, 자그마한 캐리어에 숨어있다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과연 웃음만을 줄 수 있을까. 그건 어쩌면 가장 끔찍한 이 세계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오즈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 자신의 환갑 생일에(오즈는 1903년 12월 12월생인데, 63년 12월 12월에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했다. 그의 죽음 또한 너무나 영화적이고 또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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