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인지 행운인지 비가 자주 오고 꽤 쌀쌀했던 날씨 덕에, 이번 여행에선 박물관과 미술관을 많이 가게 되었다. 특히 10년 전 3일 정도 짧게 방문하고 두 번째로 간 베를린에서는 안 가본 곳을 가려다 보니 더 그렇게 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미술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가 볼 곳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 마구 다 가고 싶어 욕심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막상 너무 피곤하기도, 기대에 못 미치기도 하고, 반대로 예상치 못한 감동과 재미를 얻게 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박물관, 미술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문화포럼(Kulturforum)과 박물관섬(Museuminsel)을 들 수 있다.
포츠담 광장 근처에 있는 문화포럼은 미술관, 전시관, 콘서트 홀 등 다양한 문화 공간을 아우르는 '복합문화단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곳에 필하모닉 콘서트홀이 있고, 악기박물관과 국립회화관, 신국립미술관 등이 모여있다.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문화포럼 티켓을 판매하는데, 두 곳 이상 방문한다면 하루 티켓을, 그게 아니라면 개별적으로 티켓을 사는 게 낫다.
여기에서 내가 간 곳은 악기박물관과 국립회화관 두 곳.
악기박물관은 피아노의 전신인 쳄발로 같은 옛날 악기부터 다양한 현악기, 파이프 오르간 등 3천 점이 넘는 악기를 전시하는 곳이다. 박물관 외에 '국립음악연구소(Staatliches Institut für Musikforschung)'라는 이름 하에 연구소와 도서관이 공존하면서 다양한 심포지엄이나 특별 전시, 음악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https://www.sim.spk-berlin.de/index.php). 내가 간 날에도 박물관 한 켠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이야기와 함께 다양한 악기소리를 들어보는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아노의 전신 '쳄발로' 같이, 현재 악기와 유사하지만 이름이 생소한 고악기들이 많았고, 엄청나게 큰 하프나 뿔 모양의 피리 같은 악기도 재밌었다.
국립회화관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을 망라하는 유럽 회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카라바조와 히에로니무스 보스, 알프레드 뒤러, 렘브란트, 루벤스 등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생각보다 전시 규모가 너무 커서 놀랐는데, 6시에 문을 닫는 터에 처음에는 가져간 책까지 찾아보며 여유롭게 보다가 나중에는 후다닥, 아쉽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운영시간: 화~금 10시~18시/목 10시~20시/토, 일 11시~18시)
문화포럼보다 더 유명한 곳이 아마 박물관섬일 거다. 진짜 섬은 아니고,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슈프레강 주변에 모여있는 5개의 박물관을 통칭해서 박물관섬이라고 부른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고고학 유물을 전시하는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이 제일 유명하다고 하고, 그 외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물 박물관인 구박물관(Altes Museum), 이집트 미술과 선사 유물 박물관인 신박물관(Neues Museum), 모네, 르누아르 등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구 구립미술관(Alte Nationalgallerie), 비잔틴과 중세,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와 조각 등을 볼 수 있는 보데 박물관(Bode Museum) 이렇게 총 5개의 박물관이 있다.
아무리 모여있다고 해도 당연히 하루에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행 일정을 몽땅 이곳에 투자할 게 아니라면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문화포럼에서 회화관을 간 터라 조금 다른 느낌의 페르가몬 박물관을 가기로 결정했다.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곳이 많아서 박물관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단연 압권은 바빌론의 성문인 이슈타르 문과 페르가몬 대제단이다. 특히 이슈타르 문은 바빌론의 시문 중 하나인데, 일부를 발굴해 가져온 것인데도 어마하게 크고 화려해 한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역사와 만날 수 있는 곳들
동독박물관은 독일 분단 시기 독일민주공화국(DDR,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그러니까 동독의 역사와 생활상 등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문화포럼이나 박물관섬의 박물관들이 상대적으로 한산했던 탓에, 동독박물관에 사람이 붐비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좁은 공간 안에 전시물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공산주의 체제 하의 독일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일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비롯해서 일반 가정집의 모습, 공산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여러 가지 홍보 방식들,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 그리고 동독 비밀경찰이었던 슈타지의 취조실을 재현해 놓은 곳 등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절약의 중요성', '노동의 신성함', '운동, 건강한 육체의 강조', '애국심' 등 당시 동독에서 강조했던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이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지점들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실제 동독사람들은 이 전시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개인적으론 이 전시가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위를 드러내면서 당시 동독의 생활상을 평범한 관광객이 보기 '즐겁도록' 평면화시킨 것 같은 느낌이 조금 들었다. 당시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사용하던 학용품이나, 사람들이 타던 자동차 등을 전시하는 것이 쉽고 친근함을 주긴 하지만, 그야말로 동독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람들의 가벼운 시선에 맞추어 전시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전시실을 나오며 기념품샾에 들어가면 그런 느낌이 더해지지만... "절약 먼저! 그다음에 소비를!" 이런 문구가 쓰여 있는 등 '동독'스러운 엽서 몇 장을 나도 사고야 말았다. 하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장벽에 그린 그림을 그대로 전시해 둔 '노천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과 동독 서기장이 키스하고 있는 그 유명한 그림이 바로 여기에 있고, 역시나 유독 이 그림 앞에만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다. 그림 하나하나가 어땠다 그런 것보다, 독일 통일에 대한 세계적인 어떤 흥분, 감탄, 감동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이곳에 모여있다고 생각했다. 길이가 1.3km인데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고 추워서 마지막 조금은 남겨두고 돌아왔다.
나에게 좀 더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은 유대 박물관이었다. 독일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의 가슴 아픈 탄압과 학살의 역사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는 전시라기보다는 그 아픔의 역사를 공간 속에서 공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끔 하는 전시였다.
어두운 공간에서 스포트라이트 빛이 이동하며 사람들의 몸을 훑고 지나갈 때 떠올리게 되는 탈출의 두려움, "망명의 정원(Garten des Exils)"이나 "홀로코스트 타워(Holocaust-Turm)" 같이 한 줌의 하늘과 한 줄기의 빛만 겨우 볼 수 있는 공간에서의 막막함과 공허감 같은 것들. 특히 "기억의 공백(Leerstelle des Gedenkens)"의 철로 된 수많은 고통의 얼굴들은 바라볼 수도, 바라보지 않을 수도 없는 비극의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안내지가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지그재그인 박물관 내부 공간 자체가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혼란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체험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