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매달 농작물 꾸러미를 받습니다. 옥상에서는 작은 텃밭을 키우고 있고요.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에 살면서 자연과 연결되는 일상을 꾸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도시와 자연을 잇는 삶에 대한 작은 기록입니다.
찌는 듯한 폭염에 (적어도 서울에는) 이렇다 할 태풍의 영향도 없었건만, 지난 얼마간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일들이 삶 한가운데를 폭풍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벌써 8월 중순이다. 이제 와 6월 이야기를 하려니 조금 민망하지만, 그냥 지나갈 수 없어 늦게나마 6월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홍성에서 꾸러미를 보내주는 친구로부터 초대장이 왔다. 농작물 꾸러미를 받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친구의 지인들 몇몇과 함께 감자도 캐고 맛있는 음식도 해 먹고 이야기도 나누는 일명 '감자 회동'.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 과정과 결과물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사람들과 나누는 프로젝트에 맞춤한 기획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토요일 오전부터 모여 감자를 캐기 시작했는데, 나는 다른 일정 때문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오후가 되어서야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7,8월의 폭염에 비하면야 그때의 더위는 더위도 아니었지만 그때도 나름대로 덥기는 더워서, 햇빛에 대비할 긴팔, 긴바지와 운동화, 밀짚모자까지 갖추고 밭으로 떠났다. 비장하게.
기계로 대규모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친구는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으면서 소규모로 밭을 일구고 있다. 자연스럽게 자라는 풀은 굳이 베지 않고 다시 흙이 되도록 하면서 곤충과 새가 밭을 찾아올 수 있도록 한다고도 했다. 당장은 수확도 적고 번거로운 일도 많겠지만 해를 거듭하며 더 강한 생명력과 비옥함을 갖는 땅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비료나 농약을 안 쓰니 수확물이 확연히 적다. 딱딱한 땅을 호미로 열심히 파는데 뿌리에 달린 감자는 고작 2-3개 정도다. 크기도 작은 아이들이 많다. 그 와중에 호미의 날카로운 부분에 찍혀 못 쓰게 되는 감자도 더러 있고. (친구야 미안ㅠ) 그래도 일곱 명 모두가 각자의 몫을 하면서 오후 한나절을 보내니 드디어 감자캐기 종료!
감자도 한 가지 종류가 아니었다. 가장 자주 보게 되는 둥글둥글한 수미감자와, 독일 유기농 종자인 길쭉한 싸티바 감자, 고구마처럼 자주색을 띠는 자주감자 이렇게 세 종류의 귀한 감자가 상자에 담긴다. 양이 적어 아쉬우면서도 어쨌든 무사히 끝냈다는 뿌듯함도 생긴다.
이번 감자 회동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감동의 음식들이었다. 첫날 뒤늦게 도착했을 때는 오전 감자 캐기를 마치고 난 후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허겁지겁 낯선 얼굴들에 인사를 하고 앉은 자리에서, 차려진 음식을 보곤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온갖 신선한 야채로 말은 예쁜 빛깔의 김밥과 토마토 샐러드, 오이냉국, 주먹밥...... 눈으로, 입으로 감동할 수밖에 없는 광경과 맛이었다.
저녁은 낮에 캔 감자로 만든 완두콩 감자수프와 감자 샐러드, 파스타, 토마토 마리네이드, 각종 야채로 차려졌다. 거기에, 한 분이 재료와 오븐을 공수해 와 직접 구워주신 피자까지. 요리 고수들이 많아 나는 옆에서 마늘이나 까면서 준비를 도왔는데, 다른 분들의 준비와 나눔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저녁에 감자를 수프와 샐러드로 조리해 먹었다면, 다음날 아침에 만난 감자는 삶은 감자였다. 여기에 삶은 계란, 직접 만든 오디잼을 넣은 요거트와 국화차. 전 날 남은 재료로 구운 빵까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인다. 모두의 조금씩의 수고가 모여 만들어진 건강하고 맛있는 상이 그저, 황송하기만 했다.
둘째 날 아침 먹기 전에도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다. (친구의 준비에 박수를 보내며...!) 아침 동네 산책에 이어서, 모아둔 나뭇가지로 나무공예(?)를 하는 것이었다. 나뭇가지를 엮어 코스터를 만들거나 나무에 실을 장식해 배지를 만들기도 했는데, 나는 나뭇가지에 노끈과 실을 묶어 간단한 모빌을 만들었다. '간단한 모빌'이라곤 해도 손재주가 별로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나뭇가지 자체가 예뻐 집에 돌아와 안방 문에 걸어두니 꽤 그럴듯했다. 홍성의 분위기와 기운이 서울의 우리 집으로 이어진 것 같아 평화로운 느낌마저 든다.
감자 캐는 일손을 도우러 갔다곤 하지만 내가 일을 한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 친구가 사는 곳을 가보고 감자를 캐는 '활동'을 해보고 자연에서 쉼을 가지고자 했던 나의 가벼운 마음이 부끄럽게도, 그곳에 온 분들이 모두 마음으로, 물질로, 많은 준비를 하고 그곳에 모였다는 것이 느껴졌다.
겉으론 고요한 것 같아도 마음속에 불꽃이 있는 친구의 준비와 수고,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준 분들, 마음과 이야기를 나누어준 분들 덕에 홍성에 다녀온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평화롭고 따듯하게, 또 맛있게(!) 남아있다. 그 간의 폭풍 같았던 삶의 소용돌이를 그때의 기억으로 조금은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