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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ul 10. 2019

다행이다, 지금 우리에게 <기생충>이 와서

- 반지하와 지하의 연대는 왜 그토록 어려울까

두 번 <기생충>을 봤다. 첫 번째는 개봉하자마자, 두 번째는 며칠 전에. 


마치 더 이상 계급 따위는 없고 오로지 취향만이 존재하는 듯 보이는 사회에서, 계급이란 것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똑바로 말하는 영화라는 생각, 그게 처음의 감상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 봉준호라는 거장 감독이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다니,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이 사회를, 세계를 되돌아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칸영화제 수상에서부터, 극장의 흥행, 뉴스, 비평적 언어 등등 까지. <기생충>을 둘러싼 떠들썩함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를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갸웃거리며 지켜보던 차였다.




그러다 며칠 전 대학 은사님을 만났다. 졸업 후 동기, 선후배들과 한 번씩 자리를 마련해 만날 때마다 시대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시는 분이다. 오랜만에 만나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현실에 대한 '급진적'인 시각은 언제나 '지금'을 돌아보게 했다. 


이번에 나눈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구조가 아니며, '수구'와 '보수'라는 거대 정치세력의 장이라는 점. 대북 이슈를 제외하고, 경제문제, 사회문제, 문화에 대한 시각  등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만을 옹호하는 거대 두 정당이 한국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 개혁, 사법 개혁, 교육 개혁 등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통렬한 논의는 없고, '갑질', '세대 갈등', '편의점 점주와 알바생의 갈등' 같은, 특정한 개인에 초점을 맞추거나, 결국은 사회적 약자들 간의 대결 구도를 부각하는 프레임을 강조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것, 사회의 구조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자, 생각이 <기생충>에 가닿았다. 제일 위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촉할 일조차 없는 곳의 사람들, 그쪽은 그대로고, 계단 아래와 더 아래의 사람들이 싸우는 형국. 이 영화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러한 한국 사회의 지형을 구조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줌의 햇살 속 반지하의 사람들과 그조차도 없는 어둠 속 지하의 사람들 간 연대는 왜 그토록 어려울까. 계단을 올라오는 문광(이정은)을 "원래는 좋은 사람" 충숙(장혜진)이 발로 차 굴러 떨어지게 하는 장면은 결정적 비극의 시작이고, 다음날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해 보려 기정(박소담)이 미트볼을 들고 내려가려는 찰나, 그를 가로막는 연교(조여정)의 등장은 결정적 비극의 끝이다. <기생충>의 슬픔은 이들에게 '이야기 좀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현실 속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래도 이 영화의 어떤 '급진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박사장(이선균)의 죽음을 통해 그 사회의 위쪽 어딘가에 조금의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돈을 벌어 그 집을 사겠다는 불가능한 꿈, "그때까지 건강하세요"라며 아마도 오지 않을 '그때'를 꿈꾸는 기우의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의 씁쓸한 공허함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기택과 기우(최우식)만이 주요하게 남고, 충숙과 기정은 퇴장하거나 희미해진다는 점은 이 영화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하는 부분이고 말이다.  



첫 번째 보았을 때의 왠지 모를 위로감과는 달리,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씁쓸함의 감정이 더해져 마음이 무거웠다. 모든 것이 선을 넘지 못해도 기어코 넘어오는 냄새 같은 존재. 정확하게 분리되어 있다가도 스멀스멀, 어느 순간 섞여버릴 때, 불편함과 불협화음이 시작된다. 박사장에게서 '냄새'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그리고 같은 날 비에 잠겨버린 집을 빠져나오면서, 기택은 이전과 달라진다. 무언가가 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경험. 기택의 표정이 그걸 말해준다. 


그냥 지하에서 "계속 살게 해" 달라는 근세(박명훈)의 말처럼, 있는 힘껏 밀어야만 겨우 열리는 지하실 문처럼, 분리와 무력감이 공고화된 세계가 한없이 무겁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 세계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다. 이런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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