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본 일본영화, <13년의 공백>
고요하게 미세한 감정의 결을 잡아내는 데 능한 일본영화 특유의, 매력적인 영화였다.
영화 제목 blank 13
blank라는 단어는, 13년 동안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라는 의미와 동시에 영화의 정서적인 공백까지도 담아낸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이미지만으로, 주인공의 표정만으로, 많은 부분을 채워가는 영화는 같은 아픔을 공유한 이들의 고통과 감내의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화장과 죽음의 이미지
영화는 화장장을 하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사는 일본은 90퍼센트 이상 화장장을 치른다고 영화는 말한다. 900도에서 1200도라는 상상할 수 없는 뜨거움. 그 화염 속에서 신체는 재와 뼈만을 죽음의 잔여물로 남길 것이다. <13년의 공백>은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는데, 그 이미지가 무척이나 허무하고 슬프다.
타이틀을 기점으로 갈리는 두 개의 Round
<Blank 13>이라는 타이틀은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 뒤, 거의 반 정도 이야기가 흘러간 뒤 등장한다. 타이틀을 기점으로 영화는 두 개의 라운드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과거의 플래시백과 현재를 번갈아가며 이 가족이 헤어져 살게 된 이유, 그리고 13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된 이유 등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어두침침한 조명 속 현재와, 노오랗고 아련한 과거의 기억이 교차된다.
그러다 타이틀이 뜨고 난 뒤 영화는 다음 챕터인,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카네코 노부아키(Kaneko Nobuaki)가 영화음악을 담당했는데, 드러머 출신답게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가미된 일정한 템포의 락 비트와 함께 두 번째 라운드가 인상적으로 시작된다. 아버지의 조금은 '이상한' 지인들이 장례식에서 각각 내놓는 사연들은 따듯하면서 슬프고, 우스우면서도 서글프다.
마음의 풍랑을 표현하는 얼굴들
도박에 빠져 살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다 가족을 떠나버린 아버지 마츠다 마사토(릴리 프랭키)의 죽음. 이를 마주한 두 아들과 아내의 복잡한 마음은 미세한 표정으로 전달된다. 특히 둘째 아들이자 주인공인 코지(다카하시 잇세이)의 표정은 변화무쌍하지도, 격정적이지도 않지만, 참아내는 데 익숙한 사람의 얼굴은 더 큰 마음의 파장을 일으킨다. 13년 만에 아버지와 마주할 때의 주춤거리는 얼굴, 여전히 돈 때문에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묘하게 일그러지는 경멸의 얼굴, 못 이룬 꿈이지만 위안을 얻는 야구 연습장에서 마음의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발버둥 치는 얼굴 등등. 너무나 싫지만 동시에 너무도 그리운 사람을, 그 시간과 마음의 공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
사실 마츠다 마사토라는 인물은 릴리 프랭키가 연기해서 미화된 측면이 있는 것도 같다. 도박을 해도, 13년 동안 가족을 떠나 있어도 그 사람 좋은 얼굴이 몇 번이고 소환되면서 영화에 온기가 돌기도 한다. 그를 둘러싸고 여러 감정들이 영화에 개입하고 있어서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영화는 이 시대에 '착하게' 살아간다는 것의 어떤 아이러니에 대해, 가족으로 엮여있는 사람들 간 하나로 결정지을 수 없는 어떤 복잡한 심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아버지의 병문안을 마치고 나오는 길, 사오리(마츠오카 마유)는 코지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다.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남은, 누군가에게는 이제 막 시작하는 3개월이라는 삶. 영화는 복잡한 삶의 층위와 감정의 결을 보여주면서, 마사토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