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알려진 거의 유일한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2003년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그녀에게>(2002)일 것이고, 그 외에도 <욕망의 법칙>(1987),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귀향>(2006),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 등등 강렬한 작품들을 만들어 온 감독이다.
원색의 미장센, 죽음 충동에 도달하는 인간의 욕망,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즈로 대표되는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배우들, 이 모든 요소들이 뿜어내는 격정적인 열망. 알모도바르의 세계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이런 불꽃들이 활활 타오르다 (특히 '죽음'으로써) 이내 꺼져버리곤 하는 세계였다.
타오르는 불꽃은 물론 아름답지만 때론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서 불편하기도 했다. '도덕'의 자리는 '욕망'과 '집착'으로 대체되고, 그것이 '사랑'과 '열정'의 아우라로 덮이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매혹적이다. 격정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가도 <나쁜 교육>(2004), <브로큰 임브레이스>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어떤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완급 조절을 한다. 스페인어 특유의 빠른 말투를 담으면서도 카메라는 인물들 사이를 천천히 움직인다. 배우들의 의상부터 탁자와 커피잔,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까지, 때론 소품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알모도바르의 영화에 매료되기에 충분하다.
조용한 열정, 황홀한 매력
<내가 사는 피부>(2011) 이후 알모도바르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던 차에, 신작 <페인 앤 글로리>(2019)는 그야말로 황홀할 정도의 매력을 뿜어내는 영화였다. 열정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동시에 고요했다. 이전처럼 불꽃같은 감정과 열망이 폭발하며 분출되기보다는, 마치 땅 속에서 흐르는 마그마처럼 조용히 부글댔다. "집이 갤러리 같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온갖 소품과 그림, 의상 등으로 이루어진 장면 장면의 색감이 그 열망을 대신하듯 너무 매혹적이어서 눈이 바빴다.
영화 속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의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유년의 기억, 젊은 시절의 사랑과 실패, 감독으로서의 명성과 배우와의 불화 등의 이야기가 현재의 삶과 다양하게 연결되는 방식은 고요하고 우아하다. 자신의 대본으로 무대에 선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는 이전과는 달리 진실하고 절제된 연기를 보이고, 알베르토의 연극을 보고 우연히 살바도르를 찾아온 옛 연인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와의 만남은 간절하지만 차분하다.
병환으로 고장 난 몸, 실패의 경험, 삶에서 헤로인 외에 더 이상의 열정을 가질 수 없음에 절망하던 살바도르는 과거-현재와의 조우를 통해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 미래는 더 이상 알모도바르의 이전 영화처럼 불꽃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지만, 때론 조용한 열정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다시 홀로 카메라 앞에 앉은 살바도르의 모습은 고유하게 아름답고, <페인 앤 글로리>는 다른 어떤 알모도바르의 영화보다 아름답다.
<페인 앤 글로리>는 70세를 넘긴 알모도바르의 자전적 영화라고 알려져 있다. 알모도바르는 살바도르의 마음으로 이 영화를 완성했나 보다.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리는 '영광'의 순간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