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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18. 2021

수평의 영화, 계속되는 삶

- <미나리>, <노매드랜드>

작년 <기생충>에 이어 올해 아카데미에서도 좋은 소식이 있었다. 리 아이작 정(Lee Isaac Chung) 감독의 <미나리>가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수상이 유력했던 배우 윤여정이 정말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 최초"라거나 "64년 만에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아시아계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국내외 언론에서 떠들썩한 상황이지만 정작 윤여정은 '최고'라는 말보다 '최중'으로 살고 싶다며 담담해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TNsaYSqzWmY (인터뷰 영상)


물론 기쁘겠지. 그치만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bang!' 이렇게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말처럼, 그녀에게는 하루하루 성실히, 계속되는 삶을 살아온 자의 자부심과 여유가 보인다. 그러니까 '너희 그렇게 야단법석 떨 거 없다, 그냥 하루하루 충실히 살다 보면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는 거고, 뭐 이런 날이 오지 않더라도 그냥 '최중'으로 같이 살면 되지 않냐'면서, 띄워주고 싶어 발동동하는 사람들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하지만, 사실상 그녀의 이런 말들은 132쪽에 달하는 분량의 대사를 NG 없이 원테이크로 촬영한 적이 있는 배우의 위엄이다. 



수평의 영화, 계속되는 삶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여러 주요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두 편의 영화. 80년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온 한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인 <미나리>와, 'homeless'가 아닌 'houseless'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조망하는 <노매드랜드>는 '지속되는 삶'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하는 영화다. 


삶 가운데 여러 차례의 선택 앞에 놓이는 순간이 오고, 그때마다의 선택을 해 나가며, 때론 그 선택을 후회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고, 이별이나 상실의 순간도 오게 마련이지만, 그때마다 또다시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지속되는 삶이 거기 있다는 것. 두 편의 영화는 주로 '수평'의 이미지를 통해 이런 계속되는 삶의 모습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보여준다. 



<미나리>의 주요 공간은 미국 아칸소라는 지역의 너른 벌판이다. 제이콥(스티븐 연)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바퀴 달린 집'은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층 집이 아닌 1층의 평평한 트레일러 집이다. 집 앞 미나리 밭으로 가는 길, 외로움을 달래 보려 찾아가는 교회를 오가는 길목, 아들인 데이빗(앨런 S. 김)의 병원에 가는 여정에서도, 카메라는 수평으로 이들을 따라간다. 영화에서 유일한 '상승'의 이미지는 제이콥과 모니카(한예리)가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공장의 굴뚝 연기, 제이콥이 피는 담배연기, 그리고 창고를 집어삼키는 불타오르는 연기 같은 것들뿐이다. 그 외에는 언제나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지평선, 지평선. 얼핏 보면 아름답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막막함. 그럼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수평'의 이미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에 대한 은유라면, 병아리들이 태워지는 공장 굴뚝의 연기, 창고를 집어삼키는 불꽃 등 '수직'의 이미지는 나아가는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은유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할머니(윤여정)는 불타는 창고를 등진 채 무언가에 홀린 듯 걷고 또 걷는다. 카메라는 그녀의 이동을 수평으로 따라가고 심장이 좋지 않은 데이빗은 할머니를 따라잡으려 힘껏 달린다. 비록 연기는 계속해서 하늘로 치솟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평평한 집 안 마루에서 나란히 누워 함께 잠을 청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안심하게 된다. 그 모습을 처연하게 지켜보는 할머니도 같은 마음이리라. 


길 위에서 나아가는 삶

<노매드랜드> 역시 '수평'의 삶을 믿는 영화다.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언니나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의 평온해 보이는 2층 집들은, 펀이 길에서 만나는 광활하고 거친 자연과 대조를 이룬다. 펀의 언니도, 데이브도 "함께 살자"고 제안하지만, 안온한 2층 침대는 펀에게 이제 너무나도 먼 이야기가 되었다. 펀은 길에서 캠핑 의자를 깔고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고, 끝없는 평야를 차를 끌고 이동하며, 아마존의 '평평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삶을 산다. 그녀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 위로 올라가는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삶은 비록 경제위기로 인해 그녀가 살던 마을이 사라지면서 시작되었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대신, 평생 번 돈을 부동산에 투자하는 삶을 사는 대신, 길 위의 삶을 살기로 한 그녀의 선택이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걱정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편견에 맞서며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값진 삶이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언니의 집에서 부동산에 대한 신경전을 벌이던 도중, 펀의 언니는 말한다. "펀의 삶이 개척자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I think, it is great! 모든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이들은 선택하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산다. <미나리>에서 창고가 불타버린 이후 제이콥과 모니카는 다시 농사를 짓기 위한 수맥을 찾는다. "머리를 쓰면 된다"며 수맥을 찾는 데 돈을 쓰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제이콥이 생각을 바꾸는 이 장면은 <미나리>의 값진 엔딩이다.  


<노매드랜드>는 이전에 살던 엠파이어의 집을 방문했다 다시 문을 나서는 펀의 뒷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앞에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집,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 집을 나와 펀은 다시금 무한한 충만함과 잔인한 공허함이 공존하는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이들의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미나리>의 가족도, 펀도 그리 쉽게 현재를 버리고 '위'를 바라보며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긴다.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한 선택을 밀고 나가 본 사람들은, 그것이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나아갈 힘을, 코어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그 선택의 기억과 경험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걸, 같이 바라고 응원하게 된다.


 씨네21 임수연 기자는 윤여정 배우론 글에서, "지금 가는 길을 믿지만 호기롭게 장담은 하지 못하는 다양한 맥락의 이들에게 윤여정의 존재는 임파워링이 될 수 있다."고 적었다.(씨네21 No.1303, 35p) 윤여정의 존재도 그렇지만, 이 두 편의 영화도 그렇다. "다양한 맥락의 이들"을 힘껏 북돋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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