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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un 21. 2021

이토록 낯선 세계에서 만난, 두 권의 책

- <어린이라는 세계>, <숭배와 혐오>

임신이라는, 이토록 낯선 세계에 진입하던 시기에, 친구와 방문한 양재의 '책방오늘'에서 두 권의 책을 만났다.


한 권은 친구가 선물해줬고, 다른 한 권은 제목과 추천글 정도만 읽고 집어 들었다. 그 사이 일종의 '정신수련'으로 두 권의 책을 정성껏 읽었고 비교적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인 <어린이라는 세계>는 두 번째로 보는 중이다.

 

출처: 알라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는 몇 번을 울었다. 더 나와 가까운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글쓴이가 어린이를 생각하는 마음의 깊이와 접근 방식이 너무나 깊고 새로운데, 그게 또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여 있어 매번 감탄하기도 했다. 독서교실에서 만나는 아이 한 명 한 명을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하고 살피며 그걸 본인의 삶과 연결해 가는 태도와 글 솜씨에 반해 아이가 있는 언니와 동생에게 선물도 했다.


나는 인간은 소중한지 아닌지 따질 수 없는 존재라고 배웠다.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똑같은 자격을 갖는다고 배웠다.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어린이가 '피어보지도 못했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글을 쓴 분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는 틀린 비유하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 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린이라는 세계>, (162~163)


단칸방에 온 가족이 살던 어린 시절 부잣집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코피를 쏟고 돌아오던 날, 길에 서서 울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필자는 '외로운 어린이들'을 생각한다. TV 방송에서 으리으리한 연예인들의 집과 거기서 노는 또래의 아이들을 보게 될 어린이를 생각한다.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 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 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느 집 넓은 거실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환상 아닐까. (102)


어린이와 관련된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이 특히 좋다. 냉철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러 관점을 살피되, "'노 키즈 존'이든 '노 배드 페어런츠 존'이든, 차별의 언어인 것은 마찬가지"(209)라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얌전한 어린이'를 선별해서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자체가 혐오이고 차별이라는 데에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한 걸까? 돈을 내고 사용하는 공간에서조차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 '세련된 노인'이나 '깨끗한 남성', '목소리가 작은 여성'만 손님으로 받는다고 하면 당장 문제라고 할 것을, 왜 어린이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차별하는 걸까?
물론 한 번씩 어린이의 고함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릴 때가 있고, 이 점이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공유하면서 어린이를 가르칠 수 없을까?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린 사람이 잘 모르고 경험 없는 사람을 참고 기다려 주는 것. 용기와 관용이 필요하지만, 인간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당연하게도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 다른 손님들의 행동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 당하면서 배워야 한다. 좋은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배워야 한다. (209~213)


'가게 주인도 힘들어서 그렇겠지'라는 슬금슬금한 마음도 이런 내용을 보면 덩달아 단호해진다. 이 책을 산 ‘책방오늘’에서 기획한 황정은 작가와의 온라인 만남 행사가 있었다. 출산 후 매우 오랜만에(100일 만이었나, 50일 만이었나) 외출을 한 언니랑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려는데, 가게 앞에서 서성이며 들어갈만한 (아이 의자가 비치되어 있고, 공간 여유가 있는) 적당한 가게를 한참 동안이나 찾지 못하던 언니를 보고, '노 키즈 존'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도 이전에는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지만 점차 그것이 '차별'의 언어라는 점이 내게 명확해졌다. 명확해지니까 '노 키즈 존'이라고 써 있는 카페를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그곳엔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출처: 출판사 창비 트위터


<숭배와 혐오 : 모성이라는 신화에 대하여>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은 약간 난해해서 전체를 다 이해했다곤 할 수 없지만, 강렬하게 박히는 내용이 많았다. 모성에 대한 신화가 곧 아이에 대한 신화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사회가 어머니에게 지우는 "불가능한 요구"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 결국은 "아이 하나하나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아이를 동등한 위치에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소위 '과도하게 몰두하는 어머니'나 '자아도취적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이는 온 세상을 비추는 거울인데(티 한 점 없이 완벽해야만 한다), 완벽함에 대한 이들의 욕구는 어머니에게 지워진 완벽함에 대한 기대와 무관하지 않다. 바꿔 말해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완벽함을 기대하는데 어머니라고 그 불가능한 요구를 자신의 아이에게 전가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숭배와 혐오>, (105)
"아이가 스스로를 기적이라 믿게끔 양육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며, 비록 방치와는 정반대에 있지만 일종의 학대라는 점에서 둘은 상통한다.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아이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모든 아이가 기적이라는 말, 즉 아이 하나하나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아이를 동등한 위치에 세우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상황이다. 또한 이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 대하여 어머니가 느끼는 경이로움과도 전혀 관련이 없다." (106)


아이의 '고유성'을 인정하며 키우는 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는 사실 구체적으로 잘 그려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은연중에라도 아이가 나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성취해주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보부아르는 말한다. "어머니가 혼자서 이룰 수 없었던 충만함, 따뜻함, 가치를 아이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면, 그는 필시 실망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오직 다른 이의 행복을 사심 없이 바랄 수 있는 여성에게만 기쁨을 가져올 수 있다. 그 여성은 자신으로 회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길 추구한다." 이것은 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고통받아야만 한다는 마조히즘이 아니다. 또 언제나 아이를 최우선시하는 이타성에 대한 호소도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누군가-우연히 당신의 아이가 된 이-의 행복을 바라며, 그 행복을 당신 자신의 자아를 위해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러지 못한다면 한손으로 준 것을 다른 손으로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타자가 거하는 방식이다. (182)


'아이가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류의 말을 여기저기에서 들으며, 아이를 갖는 것이,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상황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정신수련'은, 결국 세상과 연결되지 않은 채로 '나와 아이'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내가 오롯이 혼자 이 존재를 감당할 수는 없다는 점이고, 반대로 내가 이 존재를 아무리 아끼고 사랑하며 키워낸다 해도, 아이를 나의 자아를 위해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약간 맥이 빠지면서도, 마음이 편해진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나에게 맡겨진 과제가 그저 "아기를 아기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물론 아이를 돌봐야 하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힘듦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해도 왠지 용기가 난달까.


모성이 더 넓은 세계와 절연될 때 피폐해지는 것은 모성만이 아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세상이 파리지옥 같은 자신만의 세상에 갇히게 될 때, 손상되고 수모를 겪는 것은 어머니와 아이들만이 아니다.(184~5)


임신이라는, 이토록 낯선 세계에 들어왔지만, 그동안의 나의 세계가 당장 “더 넓은 세계와 절연"된다거나 천지개벽 수준으로 뒤집어지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걱정을 떨쳐버리려 한다.


뭔가 너무 비장한 듯도 싶지만, 비장해야 할 만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니까, 또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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