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를 먹다가 딸기가 주는 황홀함에 취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입안에 남은 딸기의 여운을 간직하면서 딸기의 위대함을 탐닉해봤다. 딸기는 멋있다. 이는 오탈자가 아니다. 딸기의 맛을 모르는 자는 없지만, 딸기의 '멋'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내 PC의 바탕화면은 노노카가 점령하고 있다. 노노카의 작은 몸짓과 목소리는 내 마음을 전부 홀리기에 충분했다. 그래 역시, 아들보다는 딸이지!라고 생각을 굳히면서 딸기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딸기는 190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고 한다.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던 그 시절, 딸기의 이름을 '아들'기 대신 '딸'기라고 지었던 건 혁명적인 작명이었을 것이다. 만약 아들기라고 지었다면, 넘치는 수요 때문에 이 땅에서 영원히 씨앗이 말랐을 것이다. 아무튼 딸기의 이름엔 멋이 있다. 시대적 흐름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선구적인 혜안으로 탄생한 소신 있는 이름이다.
딸기는 원래 멋으로 기르는 관상용 식물이었다. 한 때 일본이 우리나라 딸기의 품종을 가지고 자기네 것이라고 딴지를 건 적이 있다. 우리의 딸기 품종이 일본 딸기 품종을 개량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데, 일본 품종도 사실은 서양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더군다나 품종의 소유권은 품종의 탄생지에서 붙여진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근본 타령은 이래나 저래나 근거가 없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딸기의 근본이 관상용 식물이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딸기는 출신성분을 뛰어넘어 식용 과일의 최정상에 자리 잡은 과일계의 이단아, 식물계의 개천룡이다. 배우 진기주도 한때는 회사원이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작가가 되기 전엔 재즈바 사장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시킨 자들의 진취적인 멋이 딸기에게 있다. 그래서일까 딸기를 입안에 넣으면 진취적으로 콧 평수를 확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딸기의 향과 멋을 더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딸기는 상처를 겉으로만 받는다. 이제껏 겉은 멀쩡한데 속은 썩어버린 딸기를 만나보지 못했다. 딸기는 겉 표면부터 무르거나 시들어서 상태를 바로 알아챌 수 있다. 딸기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아마 상처 받기 쉬운 예민한 사람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달콤하지만 예민한 사람. 딸기는 예민하기 때문에 더 달콤할지도 모른다. 본인의 예민함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예민해서 상대방한테 더 부드러울 줄 아는 것. 그것이 예민함의 멋이다.
우리가 먹어왔던 딸기의 과육 부분은 사실은 열매가 아니라 꽃의 한 부분이다. 딸기의 열매는 표면에 박혀있는 씨앗 부분이다. 그동안 우리가 딸기의 꽃을 먹어왔다니, 뭔가 속은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낭만적이다. 딸기꽃에 관심이 생겨 꽃말을 찾아봤다. 딸기꽃의 꽃말은 우정이라고 한다. 우정을 나누고 싶은 친구와 술 대신 딸기를 나눠 먹어보면 어떨까. 딸기의 맛은 알아도 멋은 모르는
친구에게 기회를 틈타 딸기의 멋을 전파해보자. 소신과 진취 그리고 예민함이 있는 딸기의 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