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새로운 회사로 옮기고 나서 종종 드는 생각이다. 절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팔랐다.
자부해왔던 지구력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는데 가장 나를 지치게 만든 건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였다. 어느 회사에나 또라이가 한 명쯤은 있다고 하는데 왜 하필 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걸까. 나도 안다. 회사라는 공간이 내가 원하는 사람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란 걸.
사회생활 6년 차에서 나온 짬이랄까. 그동안 또라이를 만나면 나는 웃으며 한 발 물러서 주었다. 튼튼한 나의 인성으로 무례함을 참아주고 배려해주면 대부분 갈등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이 또라이는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새로운 유형의 또라이였다. 애써 웃으며 그에게 이것저것 맞춰봤지만 돌아오는 것 텃세와 무례함 가득 섞인 가래침이었다. 이런 무례함을 감당하면서까지 이 절벽을 굳이 올라야 하나란 생각이 들어 절벽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쭈욱 빠졌다.
어느 방송에서 조우종 아나운서는 본인이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며, 남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못해 힘들다라며 고민을 토로했다. 심지어 그의 딸이 20대가 되어 포르쉐를 사달라고 떼를 쓰면 어떻게 할 거냐라는 질문에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을 해 모두를 경악케 했다. 그가 견디고 있는 힘듦이 조금 미련하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했지만 내가 매달려있는 절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려가 악역을 만든다."
오은영 교수님이 그에게 따끔하게 조언했다. 교수님의 말이 공감은 갔지만 왠지 분했다. '배려를 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잖아요!'라고 조우종 편에서 교수님께 따져 묻고 싶었다. 그 문장은 '너 여태까지 잘못 살았어.' 라며 내 중심을 흔들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해놓고 곱씹어보기로 했다.
나는 배려하지 않는 방법을 까먹었다. 배려가 문제라면 그딴 거 다시는 안 하겠어!라고 다짐해보았지만 막상 어떻게 안 해야 하지?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상대방에게 아쉬운 소릴 하는 것에 쩔쩔매는 스타일이고, 내 의사를 표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 의견에 맞추는 것이 더 편했다. 어쩌면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한 순간에 남을 배려했다고 정신 승리했던 것 아닐까.
배려는 타자를 위하는 마음이다. 내 어려움을 위해 베풀어 버리는 게으른 호의가 아니다. 그런 게으른 배려를 받는다면 나라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진정한 배려를 하려면 타자와 나 중 누구를 위한 것인지 구분해야 하며, 의사 표현이 필요한 순간을 가려내야 한다. 본인의 의사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은 타자가 나를 배려할 기회를 빼앗는 기회이기도 하다.
'벼리지 못한' 배려는 악역을 만든다.
문장을 고쳐 적었다. 배려가 악역을 만들지 않도록 배려를 부지런히 갈고닦아야할 것이다. 나는 당분간 이 문장으로 절벽에 더 매달려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