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넓히면
엣지이펙트(Edge Effect) 우리 말말로는 가장자리효과라고 한다. 생태학 수업 시간에 배웠던 개념인데, 단어가 주는 강렬함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용어이다.
동식물이 모여 사는 생태계에는 ‘가장자리 효과(edge effect)’라 불리는 현상이 있다. 서로 다른 생물군의 서식지가 나란히 붙어 있을 때 그 경계지역에 사는 종의 다양성과 밀도가 각 서식지 중심지역보다 훨씬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서식지의 서로 다른 요소가 혼합되는 이 경계지역이 다양한 식량자원과 환경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장자리는 내부에 비해 높은 종 다양성과 밀도를 가지며, 일부 종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일부 종에 있어서는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가장자리효과는 환경이 바뀌는 구간, 즉 환경의 가장자리 경계면에서 종의 다양성이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가장자리효과를 가장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강의 하구 지역이다. 강의 하구에는 민물에서 서식하는 생물들과, 바닷물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서로 다른 환경이 만나는 경계지역은 더 높은 종의 다양성이 보장된 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점봉산에서도 가장자리효과를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이 있었다.
2006년 점봉산에서 야생화를 조사할 때 우리 팀은 등산로 입구를 시작점으로 잡고 곰배령 정상까지 100m를 기준으로 연구 구역을 나누었다. 이렇게 구역별로 야생화를 조사하다 보면 다른 지점에 비해서 유난희 종의 개수가 많은 구간이 나타나곤 했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숲길 입구 주변과, 등산로가 끝나는 곰배령 정상 근처, 그리고 입구에서 1600m 정도 되는 민가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이 구역들의 공통점은 숲길과 들길이 서로 바뀌면서 하늘이 열렸다가 닫히기도 하는, 서식 환경이 교차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바로 서식 환경의 가장자리(엣지) 지역이다.
가장자리효과를 관찰할 수 있는 첫 번째 구간은 등산로 입구부터 약 500미터까지로 숲길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주차장에서 들길을 거쳐 숲길이 나오는 여러 서식 환경이 존재하는 구간이다. 본격적으로 숲길이 시작되면서 열려 있던 하늘은 닫히고 나무그늘로 가려진 길이 시작된다.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 같이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뿐만 아니라 벌깨덩굴, 노루오줌, 연령초처럼 숲에서 사는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곰배령 정상 근처에서도 가장자리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
곰배령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면서 닫혀 있던 하늘이 활짝 열리기 시작한다. 숲길이 끝나고 넓은 고원으로 환경이 바뀌는 구간으로 관찰되는 야생화 종류의 개수도 많아졌다.
다른 곳과 다른 점은 고도가 높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바람에 강한 꽃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골풀이나 선이질풀 등 다른 구간에서는 보기 힘든 꽃들이 관찰되곤 했다.
가장 확실하게 가장자리효과를 관찰할 있는 구간은 등산로 입구 기준 1600m부터 400m 정도 되는 구간이다. 몇백 미터에 걸쳐 숲길과 민가가 번갈아 나오는데, 다른 어떤 조사 구간보다 많은 종류의 야생화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소루쟁이와 질경이, 애기똥풀, 톱풀 등 민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꽃부터 산괴불주머니, 현호색처럼 숲에서 볼 수 있는 꽃들이 어울려 서식하고 있었다.
나는 이 구간에서 관찰되는 가장자리효과가 가장 인상 깊었다.
세 군데 모두 각각의 특성에 맞게 많은 야생화들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 구간에서 나타나는 가장자리효과의 환경적인 요인이 가장 극적이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1600m 지점은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숲길 환경이 서서히 들길과 교차되고 민가가 존재하는 구간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환경과 숲의 환경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심지어 이 깊은 산속에서 냉이꽃을 만날 수 있었다)과 숲 속에서 볼 수 있는 한계령풀 같은 야생화를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발견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 신기했던 건 이 구간의 야생화들은 서식지의 경계면을 조금씩 침범하며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햇빛을 좋아하는 야생화가 숲길 가장자리 그늘에서 서식하고 있었고, 그늘은 좋아하는 야생화가 햇빛이 가득한 길가에 피어 있기도 했다.
꽃들은 자신의 기준을 조금 넓히며 환경의 경계면에서 서식하고 있었다.
가끔 사무실에서 자신의 영역과 기준이 확고한 사람을 만나곤 한다.
H책임이 그런 스타일이었다. H책임은 한 업무를 십여 년 가까이하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업무 프로세스는 달달 외울 정도로 습득하고 있었고, 일에 관한 이론과 히스토리도 거의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의 업무 처리는 노련하고 신속했으며 웬만한 돌발 사항도 어려움 없이 대처하였기에 일을 잘하는 직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H책임은 다른 사람의 의견은 귀담아듣질 않는 경향이 강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쉽게 무시했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거의 모든 걸 처리하곤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면 무조건 틀리다고 여겼다. 의사결정을 위해서 회의를 하더라도 결국 그의 의견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H책임의 업무 스타일이 고객이나 상사들에게는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특히 후배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H책임은 함께 일하는 후배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이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후배의 자존심을 많이 상하게 만들기도 했다.
H책임의 입장에서 후배의 의견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기준에 맞는지 아닌지가 중요했다. 결국 그와 일하던 많은 후배들이 울며 떠났다.
그런 그의 성향으로 인해 같이 일하려는 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었다. 프로젝트 리더가 H책임이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외주 개발자들도 있었다. 개발자들의 자율성은 보장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기준대로 강하게 푸시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결국 H책임은 많은 일을 혼자서 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겪곤 했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H책임이 조금씩만 자신의 기준을 넓혔으면 어떠했을까 싶다.
다양한 업무 케이스를 만나 경험이 쌓이면 보통 허용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관용이 생기기 마련인데 오히려 고집만 더욱 강해져 가는 모습이 매우 안타까웠다.
H책임의 경계가 좀 더 넓었으면 어떠했을까?
다른 사람의 의견과 방식을 어느 정도 수용하며 자신의 영역에 받아들였으면 어떠했을까?
아마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협업하며 업무를 수행해 나갔을 것이다. 좀 더 쉽고 효율적인 방식을 발전시키고, 주변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좁은 범위의 기준은 결국 자신의 땅을 좁게 만든다.
좁아진 땅은 외부 환경이 바뀌면 순식간에 서식할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경계에 걸쳐있다는 것, 기준이 넓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다양하다는 것은 더 큰 변화를 견디고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자리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야생화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