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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공 Mar 01. 2023

서양민들레

우리나라 꽃일까? 서양꽃일까?

  사 4년 차 직장인 사춘기로 한참 방황하던 나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다.

  해외 출장이었다. 그것도 미국 출장! 동기들은 출장 기회조차 거의 없었고, 가 봐야 가까운 중국이 전부였는데 미국이라니. 선택받은 자의 기쁨과 설렘으로 출장을 준비했다. 사춘기는 사라졌고 야근은 즐거웠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남쪽에 위치한 어바인의 한 건물에서 그룹사 IT 프로젝트의 팀원으로 한 달 정도 일을 하게 되었다. 북미, 중미, 남미 법인 IT 담당자들과 한국에서 출장을 온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매우 큰 프로젝트였다.


  내 업무 파트너는 북미 법인의 L 누나였다

  L 누나는 한인 2세로 알래스카에서 태어난 미국인이고 꽤 토속적인 한국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자연을 좋아해서 고향의 여름을 이야기할 때면 눈이 반짝거렸다. 한국말은 살짝 혀가 굴러가는 발음으로 꽤 능숙하게 구연했지만, 한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누나는 머릿속에서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업무를 하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갑자기 의자를 당겨 앉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정자세로 고쳐 앉아 메일을 소리 내서 읽기 시작할 때가 있었다. 한국어로 온 메일을 읽을 때였다. 그러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옆자리인 나에게 바로 묻고 했다.

  "헤이! 명일? 명일이 모야? What's that mean? 이게 뭐선 뜻이야?"

  "누나 내일이요 내일. 투모로우~"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업무가 남아있던 나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저녁은 숙소에 들어가서 대충 먹거나 여의치 않으면 그냥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회식을 떠난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회식에 간 줄 알았던 누나는 햄버거 세트 2개를 사 왔다. 이 동네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햄버거라고 했는데 크기가 평소에 먹는 불고기버거의 2배는 되어 보였다.

  그래도 업무 파트너라고 챙겨주는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남자는 배고프면 안 돼. 이거 남기면 나중에 지옥 가서 돠~ 먹어야 한다고 할모니가 그랬어. 얼른 먹어. 다 먹는 거 보고 갈꺼야"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진심이었다. 한국에서도 어르신들에게서나 들을 만한 멘트를 태평양을 건너와서 미국 땅에서 듣다니. 그것도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누나에게서. 나는 사뭇 놀라며 감자튀김을 집어 들었다. 누나는 내가 힘겹게 햄버거 세트 2개를 다 먹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곤 뿌듯하게 다시 회식 장소로 떠났다.

  

   고봉밥을 차려주시곤 다 먹으라고, 힘겹게 밥그릇을 비우고 나면 모자라지 않느냐고 주걱을 주섬주섬 잡으시던 우리 고모가 문득 생각이 났다.

   누나는 미국인이었지만 나보다 더 한국인 같았다. 한국인의 정도 나보다 더 많았다. 어쩌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흡사 어르신과 대화를 하는 느낌도 들었다. 많은 생각이 누나의 부모님이 이민을 가셨던 1970년대 한국에서 멈춰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덜 전통적인 건 2010년대 한국에서 출장을 간 나였다.


  곰배령의 조사 구간의 시작과 중간쯤엔 하늘이 열리는 부분이 있다.

이 구간은 민가가 몇 채 있고, 소루쟁이, 닭의장풀, 개망초 등 우리가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민들레이다.

  나는 길가에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민들레라고 기록했다. 교수님은 민들레의 꽃잎 뒷부분을 슬쩍 보시더니 서양민들레라고 기록을 고치라고 하셨다.

  '서양민들레? 귀화식물? 곰배령은 마지막 남은 우리나라 고유의 원시림이라며? 귀화 식물이 있다고?'

왜일까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여긴 민가가 있고 사람들이 오고 가니 서양 민들레가 있을만하다고 여겨졌다. 다만 이 깊은 산골에서, 당연히 우리나라 토종 꽃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곰배령에서 유럽산 꽃을 만나니 묘한 이질감과 함께 배신감도 살짝 느꼈다.


  토종 민들레와 서양 민들레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꽃을 받치고 있는 꽃받침이 까져 있으면 서양 민들레, 감싸고 있으면 토종 민들레이다. 서양 민들레가 좀 더 노랗고 토종민들레는 좀 더 연하다.


서양 민들레. 꽃받침이 살짝 까져 있다.

                                                


곰배령 조사구간의 서양 민들레

                                                    

  토종민들레는 벌과 나비들에 의해서만 씨앗을 내릴 수 있지만 서양민들레는 바람에 날아가서도 씨앗을 내릴 수 있다고 하니 퍼지는 속도가 토종민들레가 상대가 될 수가 없다.

  서양민들레는 정확하진 않지만 1910년대쯤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유럽에서 시작된 꽃이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으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퍼졌다. 요즘 토종민들레는 보기 힘들고 길거리에서 보이는 민들레는 대부분은 서양 민들레라고 보면 된다.

  

  곰배령 조사구간에서도 서양 민들레가 많았다. 언제 이곳 깊은 산골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조사하는 동안 서양민들레가 못마땅했었다. 우리 자생종을 조사한다는 자존심과 우리 꽃인 줄 알았는데 서양산이었다는 배신감으로 마음을 닫았기 때문이다. 기록에서 지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서양 민들레는 우리 꽃이 아닐까? 우리 땅에 온 지 100년이 지났고 몇 세대를 거쳐 적응했으며 개체도 많으니 우리 꽃이라고 해도 될까? 아니면 서양에서 온 유전자를 가졌으니 그냥 서양 꽃일까? 우리 꽃의 기준은 무엇일까?

  L 누나는 한국인일까? 아니면 나보다 더 한국인의 마음을 가진 미국인일까? 

  출장이 끝나고 몇 년 후 아내와 방문한 곰배령에서 노란 서양민들레를 보면서 나는 L 누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후로 민들레를 보면 미국 출장 때 만난 많은 한인 2세 분들이 생각이 난다. 부모님 세대부터 민들레처럼 강하게 뿌리내려 자리 잡은 분들.


  업무도 부서도 바뀌었지만 L 누나와는 계속 인연이 되어 아직도 사내 메신저로 안부를 묻는다.

  'ㅇㅇ누나! 할룽'으로 영어 이름 대신 그녀의 토속적인 한글이름으로 메신저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한글을 사용하고 누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신기한 대화창이 생겨난다. 다행인 건 이젠 누나의 한글 실력이 많이 늘어나서 내 메신저를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아마 정자세로 자세를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누나는 미국인이고 한국인이다. 하지만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는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여름을 이야기해 준, 내가 배고플까 봐 햄버거 세트를 2개나 사 온 그저 고마운 사람이다.


  서양민들레는 서양 꽃이며 우리 꽃이다. 하지만 역시 중요하지 않다. 100년 더 전에 유럽에서 넘어와 우리나라 가장 깊은 골짜기까지도 퍼진 강한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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