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다른 방식
입사 후 3년 정도가 지나니 어느 정도 IT 일이 손에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내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시기였다. 당연히 거의 대부분의 업무를 선배들의 방식을 따라 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선배들이 만들었던 프로세스였기에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잘 모르면 쉽게 물어볼 수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연차의 부서원들은 대부분 이렇게 일을 했다.
친한 동기와 같은 업무를 했던 후배 A가 있었다. 이 후배는 업무 방식이 우리와 달라서 기억에 남는다. 생각하는 것도 특이한 후배였는데, A 사원은 업무를 진행할 때 선배들이 만들어 두었던 프로세스대로 업무를 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뭔가 좀 독특하게 업무를 진행했다. 분명 매뉴얼이 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매뉴얼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좋은 말로는 시대에 맞는 창조적인 인재였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업무를 진행하는 후배였다.
나와는 다른 시스템을 담당했기에 크게 상관없었지만 사수였던 내 동기는 A 사원의 업무 방식을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서 혼도 많이 냈다.
"A 씨, 오전에 이야기한 것 확인했어? "
"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선배님이 말씀하신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다른 것 먼저 확인했습니다.
"아~ 왜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지? 어떤 식으로 진행한 건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기가 셌던 내 동기는 자신이 하던 방식대로 하라며 A 사원을 자주 혼냈고 동기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는 A 사원 이야기를 하며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데 왜 자기 마음대로 하는지 모르겠다며, 결국 지도하던 자기까지도 혼나게 된다고 미치겠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하지만 자의식이 강한 건지, 선배들이 기존에 만들어 놓은 프로세스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A 사원은 자기의 방법으로 계속 일을 해 나갔다. 자기가 더 합리적이고 더 나은 방법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선구자의 길을 가려고 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방법을 바꾸지 않았던 A 사원은 더 자주 혼났고 그 강도도 점점 강해졌다. 그런데 참 신기했던 건 그렇게 혼이 나가면서 어찌어찌 자신의 방법으로 목표를 이루었다. 시간이 좀 더 걸렸고 조금은 더 힘겨워 보였지만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하였다.
물론 옆에서 보고 있던 내 동기는 죽을 지경이었지만. 참신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선배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고, 시행착오로 인한 실수로 다른 선배들을 고생시키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목표를 완수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기했다.
나는 A 사원을 보면서 족두리풀을 떠올렸다.
곰 같았던 20대 후반 남자 아저씨를 보면서 꽃을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난 A 사원을 보면 족두리풀이 자꾸 생각이 났다. 족두리 풀은 쥐방울과의 풀로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산지의 축축한 나무 그늘에서 산다. 꽃이 시집갈 때 쓴다는 족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며 꽃은 봄에 피운다.
나는 족두리풀을 2004년 3월 곰배령의 연구지에서 처음 만났다.
꽃이 땅에 가까이 있고 색깔이 화려하지가 않아 눈에 쉽게 띄지 않았지만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던 꽃이었다. 족두리풀은 내가 알고 있던 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꽃을 머릿속에 그릴 때는 기다란 줄기 위에 달려있는 모양을 생각한다. 하얗거나 노랗게 밝은 색깔을 떠올리고, 좋은 향기를 내서 벌이나 나비를 유혹해서 수정을 하리라 생각을 한다. 그리고 꽃의 아랫부분에 잎과 그 아래 뿌리를 생각한다.
하지만 족두리 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꽃과는 다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꽃이 땅바닥 가까이에서 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로 줄기가 있고 잎이 마치 지봉처럼 꽃을 가린다. 꽃 색깔도 화려하거나 밝지 않다. 뭔가 퀴퀴하고 썩은 나무 같은 색깔이다.
곰배령에 조사를 가서 처음 이 꽃을 발견하고는 그 모양이 참 특이해 의문이 생겼다. 나름 생물학을 전공했던 학생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모양은 수정에 절대적으로 불리할 텐데.... 어떻게 수정을 어떻게 하는 걸까? 다른 봄꽃과 경쟁할 때 나비와 벌을 유혹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런데 개체 수는 많네? 어떻게 번식을 한 거지? '
꽃을 피우는 풀들에게 수정이란 일생일대의 제일 큰 이벤트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식물들은 어떻게든 수정이 유리하도록 자신들을 진화시켜 왔다. 그런데 족두리풀은 번식에 불리한 모양이라니.. 어떻게 된 걸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교수님께 물어보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족두리풀의 수정은 나비가 꿀벌처럼 날아다니는 곤충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네나 개미 같은 땅을 기어 다니는 곤충들이 족두리풀의 수정을 담당한다. 화려한 색깔과 꿀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살고 있는 개미나 지네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래서 꽃의 위치는 바닥에 가까이 있고 꽃 색깔로 썩은 나뭇가지나 썩은 열매 같은 거무튀튀한 색깔이다.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족두리풀은 매우 성공한 종이다.
다른 꽃과는 다르게 특이한 번식 전략을 통해서 유전자를 이어나가고 있으니 충분히 성공한 한해살이풀이다.
A 사원은 족두리풀이었다. A 사원은 기존 선배들의 방식을 따라 하지 않았다.
족두리풀이 선택한 번식 전략처럼 특이하지만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선배들이 만들어준 벌과 나비를 위한 꿀이 아닌 아닌 지네나 개미를 위한 방식을 찾은 것이다.
업무를 하다 보면 사람들마다 업무 스타일이 다 다르다. 정말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딱따구리처럼 계속 쪼아가면서 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윗사람을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청국장처럼 일을 푹 고아 두다가 닥치면 야근과 밤샘을 하면서 벼락치기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업무 스타일에 나쁜 건 없다. 조금 다를 뿐이고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많이 혼이 나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을 뿐이다.
나 역시도 디테일이 부족하다고 혼이 많이 나기도 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보고서인지 모르겠다는 질책에 수십 번을 다시 작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고 인정받았다. 업무 수행능력은 늘어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내 스타일에 익숙해졌다.
A 사원은 족두리풀처럼 성공했을까?
안타깝게도 A 사원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었다. 동기의 무한 갈굼에 못 이겨서인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대기업의 생리가 몸에 안 맞아서인지 나는 A 사원의 성공 스토리를 끝내 보지 못했다.
A 사원에게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조금만 연차가 더 올라간 후 자신만의 업무 스타일을 찾았다면 인정도 받고 성공했을 것이다. 남들이 하는 흔한 방식이 아닌 족두리 풀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어디선가 꽃을 피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