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부신 보랏빛의 기억
나의 군 생활은 꽤 낭만적이었다.
나는 다도해가 보이는 남쪽 바다의 한적한 해군 기지에서 2년 반을 지냈다.
다른 군인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생활이 적지 않게 보장되었기에, 겨울날 늦은 아침엔 햇살 반짝거리는 바다를, 보름달 뜬 밤이면 바다에 비춰 찰랑거리는 달을 한가롭게 볼 수 있었다. 가끔은 태풍을 피해 연안으로 들어온 돌고래를 구경하기도 했고, 갈매기에서 건빵을 주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어느 날부터 나는 주변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선임들에게는 부대 주변을 정리 정돈하기 위한 관찰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별로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하루마다 다르던 남해 바다.
근무지 근처에서 살고 있던 곤충과 풀, 나무, 갈매기, 물고기, 바다의 색깔, 그날의 날씨, 주변에서 나는 소리 등 아주 사소한 것들도 관찰하고 느꼈다. 근무지 코앞까지 들어온 숭어 때의 숫자를 세어 본 적도 있었고, 건물 주변에 민들레가 몇 송이나 되는지 세어 보기도 했다. 건빵으로 유혹한 개미들을 반나절 동안 관찰한 적도 있었다.
진해 해군 기지의 봄은 빠르고 따뜻하다.
어느 이른 봄날, 나는 근무지 주변 도로 연석 사이에 핀 보라색 꽃을 보았다. 봄 햇살이 좋았기 때문이었리라. 그렇게 아름답고 눈부신 보랏빛은 처음이었다. 꽃의 이름도 모른 채 그 보랏빛에 홀려 몇 시간 동안이나 넋을 놓고 앉아 살폈다.
무슨 꽃일까? 바람꽃? 팬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꽃이었다. 꽃에 대한 지식은 없었고, 군대라는 제한된 장소에서는 꽃 이름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미뤄 짐작하기만 했었다.
꽃이 지고 몇 달 후 휴가 중에 들른 서점에서 나는 그 꽃이 제비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봄에 피는 흔한 꽃, 보라색뿐만이 아니라 노란색 하얀색도 흔하게 피는,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다음 봄에 다시 제비꽃을 보기 전까지 보랏빛을 그리워했다.
제대를 하고 복학 후 제비꽃은 매우 흔하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이란 것을 깨달았다. 학교 풀밭 어디에서나 흔하게 피어 있었다. 동아리 활동을 위해 자주 들르던 학생회관 뒤편에, 축구를 하려고 나간 운동장의 한구석에서도, 도서관 옆 화단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인식하지 못했던 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남해 바닷가의 눈부시게 빛나던 제비꽃에 보랏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보랏빛 때문에 내 삶은 꽤 많이 바뀌었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하던 나는 환경생태학을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생태학 실험실에 프로젝트 멤버로 참여해 우리나라 야생화를 관찰하고 연구했다. 거의 매주 야생화를 관찰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마지막 원시림이라는 점봉산에 다녔다.
제비꽃, 얼레지, 현호색, 벌깨덩굴, 한계령풀, 금강초롱, 연령초 등등 등등.... 갈 때마다 바뀌어 있던 점봉산 숲의 꽃 풍경을 보고 느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비록 생태학과는 완전히 다른 IT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내 20대의 삶은 온갖 꽃들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꽃들이 살아가고 유전자를 남기는 방식은 많은 부분 비슷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개성이 넘친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꽃들과 비슷했다. 공통적이지만 특이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각났던 꽃들. 어떤 이는 족두리풀이었고, 어떤 이는 바람꽃 같았다. 또 어떤 이는 겨우살이를 닮았고 어떤 이는 얼레지와 비슷했다.
연석 사이의 보랏빛을 처음 발견한 지 거의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매년 햇살이 따뜻했지면 나는 꽃몸살을 앓곤 한다. 눈부셨던 햇살 아래 보랏빛이 계속 생각난다. 흔하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꽃.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작은 보랏빛 꽃.
지금도 따스했던 이른 봄 어른 거리는 남해 바다의 눈부신 제비꽃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