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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공 Mar 08. 2023

꿩의바람꽃

화려한 독초

"그러면 그게 맞는 모양이구만. 며칠 전에도 석이 따러 우풍재쪽으로 올라가다 독고사리 몇 개 그래 올라온 걸 봤는기. 그게 보이엔 꼭 고사리순처럼 얄상하고 여리여리해도 속은 여간하지 않은 독초야. 다른 나물에 섞여 잘못 입에 들어가면 채달(풀독)이 오르구"
"예 그러면 맞는 것 같은데요"
예전 꽃을 함께 본 일병도 그런 말을 했다. 보기엔 연약하고 이뻐 보여도 사실은 뿌리와 줄기 안에 강한 독성이 있다고. 그러면서 일명은 바람꽃이란 말도 어쩌면 원래 우리가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서양에서 들어온 이름을 그대로 풀어쓴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
늘 살아온 은자당 주인이 독고사리는 알아도 그 독고사리의 이름이 바람꽃인지 모르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은비령, 이순원


  깊이 감춰진 땅 "은비령(隱秘嶺)"

  이순원 작가의 1996년 작품이다.

  군 복무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읽었다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 20년 전 기록했던 독서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나처럼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책을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오래간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작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났다. 특히 '은비령'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나중에 작가가 말하는 곳에(한계령에서 내려오다가 옆길로 빠지는 길)에 가서 꼭 바람꽃을 보고 싶다. 꼭 사서 간직하고 싶은 책이다. 2002.7.26 "

  

  이 작품을 만난 후 몇 번을 탐독했다. 은비령이란 신비스러운 공간이 주는 설렘과, 그 공간에서 이어질 듯 이어지지 못한 인연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바람꽃 이야기에 나는 매혹되었다.

  바람꽃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소재이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여자 주인공을 '독고사리' 즉 바람꽃에 빗대어 말한다. 아름답지만 독을 간직하고 바람꽃처럼, 가까이 가고 싶지만 결국 그럴 수 없는 존재로 표현한다.


  그런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던 바람꽃을 나는 꽤 오래전부터 보고 싶어 했다. 은비령에 핀 바람꽃을 보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되었다.


  2005년 이른 봄, 교수님과 함께 조사 장소 선정을 위해 처음 점봉산에 방문했을 때 봄꽃들이 한창이었다.

  꽃 이름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던 교수님께서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을 보시곤 꿩의바람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바람꽃? 독초인가요?"

  "미나리아재비과는 대부분 독초야. 먹으면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배탈은 날 수 있지."

  라고 무덤덤하게 대답을 하셨을 때

  "아!!!! 네가 바람꽃이구나!!"

  나는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벅차올라 웃음이 나왔다. 아마 교수님은 점봉산에서는 흔한 바람꽃을 보고 기뻐하는 나를 보시곤 생태학 대학원에 꼭 데리고 와야 할 인재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저 바람꽃이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바람꽃을 처음 만났다. 바람이 살짝 부는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새하얗게 흔들리던 꿩의바람꽃이 아직 눈에 선하다.


  점봉산의 봄은 홀아비바람꽃, 회리 바람꽃, 쌍둥이바람꽃 등 온갖 종류의 바람꽃들로 가득하다. 바람꽃은 미나리아재미과의 여러해살이 초본이며 미나리아재비과의 대부분 그렇듯이 독을 가지고 있다. 꽃잎은 화려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단아해 보이기도 한다. 꽃대를 보면 연약해 보이기 한다. 꽃이 너무나 예쁘기에 선뜻 뿌리에 독을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햇볕을 좋아하는데 하는데 볕이 없거나 기온이 낮으면 꽃잎을 닫아버리는 꽃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조사를 하거나 흐린 날이면 꽃잎이 열리지 않은 꿩의바람꽃을 자주 보곤 했다.


꿩의바람꽃. 화려하다. 햇살 아래서 보고 있으면 새하얗게 빛난다.


활짝 피지 않은 꿩의바람꽃


  옆 파트의 S 선배는 화려한 외모와 호감이 가는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와 친절한 말투는 금방 주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S 선배가 웃으며 이야기를 하면 어느 순간 고객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공격적이었던 고객도 금세 마음을 풀었다.

  선배는 고객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예쁘고 배려심이 많은 직원이었다. 나는 선배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파트도 다르고 업무도 연관되어 있지 않기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한 번은 부서에서 크지 않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파트별로 담당자를 뽑아 진행하였는데 우리 파트에서는 내가, 다른 파트에서는 S 선배가 프로젝트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다. 난 평소에 가까워지고 싶었던 선배와 함께 일할 수 있고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기에 꽤 설레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시기, 멀리에서 보았던 것처럼 S 선배는 친절했고 나를 대하는 행동도 따뜻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싶었고 선배를 진심을 다해 호의적으로 대했다. 선배가 요청하는 업무는 웃으면서 어떻게든 완료하려고 노력했고 선배의 어려움은 발 벗고 해결해 주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이상했다. 같이 업무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피해를 보고 있었다.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인지하지 못한 채 덤터기를 쓰곤 했다.

  한 번은 퇴근을 하면서 너무나 다정하게 웃으며 본인의 남은 일을 부탁했다. S 선배는 친절한 웃음을 띠며 간단한 일이라고 이야기를 했기에 나는 걱정 말라며 넙죽 일을 받았다. 그날 나는 12시가 넘어서 퇴근을 했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또 어쩌다 한 번씩 나오는 선배의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말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분명 친절한 말투였는데 그 안에 송곳이 가득할 때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낮추면 자기가 더 돋보인다는 생각이었는지, 꼭 다른 부서원들이 있는 곳에서 웃음 띠며 나를 공격하고 무안하게 만들었다. 흔한 말로 "피아 구별"을 못하고 다른 부서원들에게 나를 "쪽팔리게" 만들기도 했다. 웃음을 띠며 이야기하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프로젝트가 끝날 시점쯤 나는 깨달았다. S 선배의 화려한 겉모습 아래 독을 숨기기 있구나. 가까워지고 편해지면 상처를 받고 탈이 나는 사람이구나. 본인의 업무 스타일이겠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의 그녀의 화려한 외모와 친절한 말투에 속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원래의 파트로 돌아간 선배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모습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Gone Girl)의 첫 장면과 끝장면에서 에이미를 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어찌 보면 그게 선배의 본모습이었을지 모른다. S 선배는 화려한 독초 같았다. 화려한 모습에 다가서지만 독은 가까이 가는 사람을 상처 주었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슬펐던 건 어느 정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S 선배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S 선배는 아예 다른 부서로 가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기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친절하고 호의적일 것이다.


현호색과 함께 피어있는 꿩의바람꽃



※ 더하는 글

  2006년 가을 점봉산에서 야생화 조사를 끝낸 후 팀원들과 동해바다로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었다. 처음 꿩의바람꽃을 만난 지 1년 반쯤 되던 시기였다.

  이른 새벽에 출발한 우리는 양양으로 바로 나올 수 있는 조침령 쪽의 구불구불한 길이 아닌 현리로 돌아서 한계령을 넘는 길을 선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낯선 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는지 여차하면 한계령에서 일출을 보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새벽길을 운전하다가 현리에서 한계령을 올라가던 길에 나는 은비령이 쓰여 있는 표지판을 봤다. 은비령산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표지판을 보곤 나는 그곳이 이순원 작가가 이야기한 은비령이란 사실을 알았다.

  우연히 나는 은비령에 왔다.

  나는 내가 조사를 하던 장소 지척에 은비령이 있다는 모르고 있었다. 점봉산과는 능선 하나 차이였다.

  이른 새벽, 풀잎 가득 맺힌 이슬과 신비스러운 산안개의 풍경은 내가 은비령에 머무르는 기쁨을 더욱 크게 해 주었다. 동해로 향하는 한참을 그 우연에 설렜고, 매우 흥분했던 적이 있었다.

  비록 은비령에 핀 바람꽃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결국 은비령에 머물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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