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삼공 Mar 12. 2023

큰앵초

자리를 지키는 힘

  큰앵초는 목이 길다.

  긴 꽃대가 잎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고 그 위에 밝은 분홍색 꽃을 피운다. 다른 봄꽃들에 비해 키가 큰 편이다. 숨지 않고 당당해서 눈에 잘 띈다. 목을 쭉 내밀고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 좀 봐주세요." 하는 모양새다.

  얼레지와 현호색이 한바탕 꽃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간 5월 초부터 꽤 오랜 기간 꽃 피는 다년생 초본이다.


  곰배령에서 큰앵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릴 적 동네 소방서 옥상에 설치되어 있던 확성기가 떠올랐다. 기다란 꽃대 위에 확성기처럼 생긴 꽃에서 "앵앵앵앵" 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조사를 할 때 꽃 이름을 외우는 것이 큰 숙제 중에 하나인데 "앵앵거릴 것 같은 키 큰 꽃, 큰앵초." 쉽게 외울 수 있었다.


긴 꽃대 위에 피어있는 큰앵초, 나는 시골 마을 회관 지붕 위에 확성기를 생각했다.

               


긴 꽃대 위에 분홍색 꽃. 키카 크다.

  

  큰앵초를 조사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특징은 자리를 지키는 꽃이라는 점이었다. 점봉산 입구에 서 정상까지 3분의 1 정도 되는 지점에 큰앵초가 눈에 잘 뜨이는 구간이 있다. 등산로에서 5m 정도 떨어진 계곡 쪽, 약간 파인 지형의 바위 옆이다.

  보통 꽃들은 비슷한 위치에 군락을 이루며 개체는 조금이라도 위치가 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큰앵초는 정확하게 한자리에서 계속 관찰되었다.

  매년 같은 자리에 꽃을 피웠다. 여러해살이 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한해살이 꽃을 많이 관찰했던 나의 눈에는 한자리를 계속 지키며 꽃을 피워내는 것이 참 신기하게 보였다.


  몇 년 전 봄, 거의 10년 만에 가족들과 곰배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들딸과 함께 탐방로를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아이들에게 이건 무슨 꽃이고 저건 무슨 꽃이며 아빠가 옛날에 조사했을 때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실컷 아는 척을 했다. 이제 고작 "엄마 까까~, 뽀로로~" 정도밖에 못 하는 아이들이었기에 당연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꽃을 꺾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곰배령의 꽃들에 신이 나서 신나게 떠들었다. 그리고 정상까지 3분의 1 지점이 되는 그곳, 거의 10년 만에 찾아간 그 자리에서 나는 큰앵초를 만났다. 정확히 계곡 방향 약간 파인 지형의 바위 옆이었다.

  졸업과 취업, 결혼과 육아, 그리고 어마어마한 체중 증가, 많이 변한 나와는 다르게 10년의 시간 동안 큰앵초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사 당시에 봤던 꽃인지, 그 꽃의 후손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너무나 반가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의 첫 근무지는 본사가 아니었다. 지방에 있는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입사 후 몇 년 동안 자신감이 가득했었다. 비전공자였던 내가 우리나라 최고 IT 대기업 중 하나에 입사를 했으니 세상이 참 만만했었다.

  그런 자신감이 지나쳐서 나는 조만간 지방 사업장을 떠나 본사로 전배를 가거나, 외국계 IT 회사로 떠나는 것이 당연한 인재라고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주변에 본사로 발령을 받아 이동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퇴사 후 외국계 IT 회사로 이직을 하는 동기들을 봤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나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지방 사업장을 벗어날 수 있냐고 엉엉 울며 방법을 물어봤던 후배가 나보다 먼저 본사로 갔을 때는 충격까지 받았다.

  남의 떡이 커 보였던 것일까? 우리 부서를 떠난 그들이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소식이 들려오면 부러움에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내가 작아 보였다.


   요즘도 IT 인력들의 이직이 한창이다. 불경기라고 하지만 많은 선후배 동기들이 다른 IT 회사로 이동을 한다. 구글이나 MS 같은 외국계 대기업에 가기도 하고, 요즘 대세라는 하는 '네카라쿠배'로 불리는 회사로 이직을 하기도 한다.

  누구는 어느 회사로 이직을 해서 연봉이 150%가 늘었다고 하고, 후배 누구는 어디에서 승진을 해서 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소식이 들려오면 여전히 부러운 건 사실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잡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전히 내가 작아 보이고 뒤처지는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나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이 자리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 준비를 해야 하나? 하는 걱정과 의문이 문득 들곤 한다.


  나는 아직 처음 발령을 받은 조직에서만 15년 넘게 일하고 있다. 15년 동안 부서가 이사를 와서 근무지가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바뀌었고 부서명이 바뀌었다. 조직 안에서 내 일만 바뀌었을 뿐 나는 이 부서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함께 일을 했던 동료들은 대부분 떠났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우리 부서에서 나는 "원주민"으로 불린다. 입사 때부터 여기에서 일한 사람이다.


  "원주민"인 나를 뒤돌아보면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많은 일들을 헤쳐 나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어느 해는 일이 너무 힘들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때려치운다는 생각을 했었고, 새로운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로 입술이 터지기도 했었다.

  힘든 상사를 만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해서 좋은 고과와 보상을 받기도 했고, 해외출장에서 새로운 동료들을 사귀고 소중한 경험들도 쌓을 수 있었다.

  그룹사 지도선배에 발탁되어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했었다.

  나는 뒤처지지 않았다. 나는 15년 동안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점봉산의 큰앵초를 생각한다.

  어느 봄은 눈이 늦게 녹았을 것이고, 어느 봄은 비가 많이 내렸을 것이다. 어느 봄은 흐린 날이 많이 햇빛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고, 어는 봄은 바람이 많이 불어 꽃대가 꺾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큰앵초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지금 내 자리에서 15년이 넘는 시간을 한해 한해 지키고 있는 나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 주변의 "원주민" 들도 충분히 칭찬받을만하다.



점봉산에서 만난 큰앵초 꽃망울


이전 09화 꿩의바람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