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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공 Mar 19. 2023

얼레지

곰배령에 한가득

점봉산 일대에 펼쳐진 원시림에는 전나무가 울창하고, 모데미풀, 얼레지, 바람꽃, 한계령풀 등 갖가지 다양한 식물을 비롯하여 참나물·곰취·곤드레·고비·참취 등 다양한 산나물이 자생한다. 일명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북방 서식지 한계선이 맞닿는 곳으로써 한반도 자생종의 20%에 해당하는 8백54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유네스코에서 생물권 보존구역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점봉산 [點鳳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점봉산에서 조사를 하며 지냈던 몇 년 동안 참 행복했다.

  물소리 가득하던 계곡 옆 컨테이너 숙소의 석유곤로 냄새, 휘영청 뜬 달 아래에서 팀원들과 즐겼던 달달한 돌배주, 한여름 차디찬 계곡에서의 물놀이, 허리까지 쌓여 있던 눈을 헤치며 올라갔다가 비닐봉지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조사 사이트......

  서해 바닷가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나에게 점봉산처럼 크고 깊은 산에서의 조사 활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새롭고 즐거웠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봄의 얼레지 밭을 이야기하고 싶다.

  한 번은 조사를 하다가 나 혼자만 뒤처진 적이 있었다. 

   아직 나뭇잎이 나기 전 야생화가 한참인 시기였다. 꽃들을 꼼꼼하게 관찰하기 위해 땅만 보며 가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팀원들은 이미 멀리 앞서갔고 나는 피어 있는 꽃을 보며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어느 순간, 구름이 걷혔는지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따사롭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춰 주변을 보았다. 초점이 맞춰지듯이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넓은 꽃밭이었다. 숲에는 얼레지가 가득했다. 온 가득 보랏빛 꽃이 피어 있었고 그 사이에 현호색과 제비꽃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서서 그 풍경을 보았다.

  

  나는 좀 더 풍경과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꽃을 밟지 않으며 조심히 얼레지 밭에 누었다. 꽃은 햇살에 빛나고 있었고 바람에 살랑거렸다. 가벼워진 내 날숨과 들숨 사이로 바람 소리만 들렸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곳에 오로지 나와 꽃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나와 꽃뿐이었다. 불과 몇 분이었지만 몇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얼레지 밭에 고요히 누워서 혼자 보낸 짧은 시간은 곰배령에서 내가 겪은 가장 아름다운 경험 중 하나이다.


  점봉산은 '천상의 화원'이라고 불린다. 야생화가 많이 피어서 생긴 별명인데 특히 봄에 피는 얼레지 꽃들은 점봉산이 왜 '천상의 화원'이란 별명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점봉산의 봄은 보랏빛 얼레지로 가득하다.

  얼레지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곰배령에서는 4월 중순쯤부터 일제히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6년에서 7년을 기다리 줄 아는 인내심이 많고 생명력이 강한 풀이다. 연한 보랏빛 꽃잎을 가지고 있으며 리본을 달고 있는 듯한 특이한 무늬가 꽃잎에 새겨져 있다. 꽃잎이 활짝 피다 못해 뒤집어 지까지 한 당당한 모습이지만, 고개를 숙여 땅을 향해 꽃 피운다.


곰배령의 얼레지, 꽃잎은 연한 보랏빛에 리본 같은 특이한 무늬가 있다. 꽃잎이 뒤집어져 땅을 바라보고 꽃이 핀다.


  얼레지는 한 개체로만 봐도 충분히 예쁜 봄꽃이다.

  하지만 얼레지의 더 큰 아름다움은 똑같이 생긴 보랏빛의 꽃 수천 송이가 한꺼번에 일제히 핀다는 것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듬뿍 받으며 얼레지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이 만들어진다. 이때 주변에 현호색, 제비꽃, 괴불주머니 같은 봄꽃이 함께 피는데 점봉산은 초록빛 보랏빛 노란빛 꽃 색깔로 온통 화려해진다.


얼레지 군락, 작은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아름답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보길 권한다.


  내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컴퓨터를 전공하지 않았던 내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IT기업에 입사를 했으니 처음 몇 년의 회사 생활은 정말 행복했고 자신감도 가득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기술을 배우고 일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고 새롭게 형성되는 인간관계, 경제 활동을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약간의 호사로운 경험 등 낯선 모든 것들이 날 설레게 만들었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으며 구성원이 된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나에게 IT 인의 길을 멀고도 험했다. 회사의 교육시스템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매우 잘 갖춰져 있었고 훌륭한 선배들이 있었지만 야생화를, 생태학을 공부했던 나에게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같은 기술을 배우더라도 IT에 대한 이론적이 배경이 약한 나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진다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 생각은 점점 쌓여 몇 년에 한 번씩 나를 주기적으로 흔들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진정 나에게 맞는 길인지 나는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항상 떠올랐고 불안했다. 솔직히 입사한 지 15년이 지난 요즘도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회사 사춘기가 심하게 왔던 적이 있다. 일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고 나는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었다. 당장이라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마음이 가득했기에 항상 우울한 얼굴로 출퇴근을 했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친한 과장님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분도 나와 비슷하게 IT와는 전혀 다른 분야를 전공하고 입사하신 분이셨는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괜찮을 거다. 회사 생활 열심히 하는 거 좋긴 한데 너무 애쓰지 말자 우리, 안되면 관두면 되잖아. 애쓰지 말고 그냥 월급 받아서 너 하고 싶은 거 해"

  나의 고민의 깊이에 비해 너무 가벼운 그의 충고는 괜한 반발심만 생기게 했다. 그저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회사 생활을 좀 오래 하신 분의 열정 없는 조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하다가 떠올릴 때면 참 현실적이고 위로가 많이 되는 조언이었다.


  누구나 자기가 일하는 분야를 사랑하고 즐기고 싶어 한다. 나 역시도 내 일을 사랑하고 즐기고 싶다. 그런데 참 쉽지 않다. 아마도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일 힘든 일 중에 하나일 것이다.

  15년 동안 내 분야를 사랑해 보려고 했는지 잘 안되었다. 여태껏 그렇게 노력했는데 안되었으니 아마 은 퇴사할 때까지고 그럴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은 과장님의 조언대로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받은 경제적인 보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고 생각하면서 지내오니 나는 내 일을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꽤 좋아하게 되었고 고마움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야생화를 공부한 IT인.

  나는 내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특별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 많은 내 동료들이 젊은 시절 알고리즘을 공부하며 밤을 새울 때, 나는 야생화의 개화시기에 영향을 주는 환경적인 이유를 고민하고 있었고, 한 줄 한 줄 코딩의 기쁨을 누릴 때 나는 얼레지 밭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나의 생태학에 대한 지식과 경험들은 내 업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을 무척 다양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회사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점봉산에서 보낸 몇 년의 기억은 업무에 지친 나를 위로해 주고 내가 내 일에 최선을 다 할 있게 해주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코딩을 하다가, 데이터를 확인하다가 햇살이 좋은 날이면 문득 '천상의 화원' 봄의 점봉산 얼레지 밭의 순간이 떠오른다.

  기회가 된다면 매년 봄 며칠씩 점봉산에 머무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기 위해 내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행복했던 기억들을 마음 편하게 다시 한번 경험하기 위해서 하는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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