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부사장님.

당신의 35년 회사생활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by 국화

수요일 저녁이면 목요일 아침 수업이 가능한 지에 대해 최 부사장 님으로 부터 카톡이 온다.
“낼 07시에 뵙겠습니다.”


늦은 회식 중에도 카톡을 보내기도 하신다.


한번은 잘못 눌린 카톡이 왔고, 이어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잠깐만요. 통화 좀 해보세요~
OO, 전화 받아봐. 영어 강사님이야.”


“Hello!”

은퇴한 야구선수 OOO였다.


사실 나는 야구팬도 아니고, 나에게 ‘유명한 야구선수’라 하면 박찬호 때부터라 큰 감흥은 없었지만
술기운에 자랑하고, 소개해주고 싶은 부사장님의 마음이 귀여웠다.


그날 전화의 용건은 다름 아닌,
“선생님, 제가 이 선수랑 술을 마시고 있어서 내일 수업 어렵겠습니다~”였다.


또 한 번은,
“어제 이재용 회장님이랑 술을 마셨는데, 참 냉정한 사람이더라고요. 아들 군대 가는 날인데도 우리랑 회식을 하고 있으니… 안타깝더라고요.”

이렇게 가끔 ‘재드래곤 Lee’와 술 마신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었다. 지인의 지인이 재드래곤이라니, 나도 어딘가 아주 멀게나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묘한 즐거움이 있었다.


잠깐 다른 이야기지만, 재드래곤님과의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가 하나 있다.
팰리세이드가 처음 출시됐을 때, 패밀리카로 이 회장님이 팰리세이드 중고를 샀다는 기사를 보고 정말 놀랐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 내가 팰리세이드를 반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팰리세이드가 막 출시된 시기라 중고 매물이 거의 없었고, 내가 샀던 검은색 디젤 8인승 모델에 문제가 생겨 직접 3일 만에 반품 처리까지 했던 터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괜히—아니, 거의 확신에 가까울 만큼—‘이건 분명 내가 탔던 그 차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재용 Lee가 내가 반품했던 그 팰리세이드를 타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아무튼 다시 최 부사장님 얘기로 돌아가 보면…


내가 “6년째 수업을 듣고 계신 분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묻는다.

“와, 그분 지금은 영어 엄청 잘하시겠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유지는 정말 잘하고 계시지. 물론 향상은 되셨지만 사실 확 늘기가 힘들어 ."


출장을 밥 먹듯 다니는 삶이니, 영어가 쌓일 수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저 다음 주 베트남 갑니다! 다녀와서 연락드릴게요.”
“아, 이번에 인도 갑니다. 거기 50도래요.”
“중국 출장 잡혀서 이번 달은 힘들 것 같아요.”


매번 영어 수업에 누구보다 열심히였던 건 아니었고, 영어에 완전히 몰두한 적도 없었지만,

목요일 아침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흘려보낸 시간이 쌓여 어느새 작은 루틴이 되었다.


그렇게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이어온 수업이 오늘로 종료되었다.


안녕하세요.
연말 임원 인사철이라
당분간 수업이 어렵습니다.
향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문자를 받았을 때, 뭔가 다른 연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매년 11월 이쯤 되면


“선생님, 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그러다 다음 주가 되면


“아, 쉬고 싶은데 1년 더 일하라네요.”


“이번에 살아남았습니다.”


이렇게 이어졌는데, 이번엔 너무 정중한 문자가 왔다.


그리고 그 주 목요일. .원래 아침에 수업을 했어야 하는 목요일 . 그날 저녁 . 바로 오늘.,


안녕하세요.
오늘부로 35년 회사생활 졸업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가끔 연락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나는 이렇게 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와우, 너무 축하드려요!
내년에 제가 한번 모시겠습니다! 봄에 연락드릴게요!
저도 너무 감사드려요!


정말 감사드릴 일이다. 덕분에 나는 회원권이 있어야만 갈 수 있는 골프장도 가보고, 내 돈으로는 좀처럼 가기 어려운 고급 일식집도 경험해봤다. 고급 사케를 한잔 곁들이며, 최 부사장님이 입사하던 시절부터 상무와 전무를 거쳐 부사장 자리까지 오르기까지—그 젊은 날의 이야기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최 부사장님의 은퇴가 기대된다.




최 OO 부사장님!
다른 회사 들어가시게 되거든 저 잊지 말고 꼭 찾아주세요!! 저 운전 잘해요!
수행비서 해드릴께요~!



진심이다.

I mean it.


영어 수업은 이어지지 못하지만, 영어 수업 덕분에 이어진 이 좋은 인연에 마음 깊이 감사드리며—그의 멋진 은퇴에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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