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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Sep 02. 2017

파도 속의 섬으로, 한 발자국_1

겨울, 제주

제주는 좋은 곳이다. 달리 설명할 필요가 뭐 있을까. 김포-제주 구간의 항공기 운항 간격이 전 세계에서 가장 촘촘해진 것은, 그만큼 제주가 매력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그런 제주에 직접 갔던 건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등 지구 반 바퀴를 돌아본 후의 일이었다. 별 것들을 다 보고 온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좋은 곳,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제주에서 내 길잡이를 해주었던 사람은 아내였다. 제주가 좋아 제주에 있는 회사에 입사해 그곳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던 사람이 내 손을 잡아 끌어주다 보니, 난 그저 입을 벌린 채 돌아다니기만 하면 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게 잘못이었다.


아내는 내게 '제주 마스터'다.


항상 혼자 다녔기에 내 여행은 언제나 내가 알아서 해야 했다.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게 내 여행이었다. 모든 걸 내가 결정하고 행동해야 했던 것과 달리, 현지 전문가와 함께하는 제주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의탁하면 됐다. 당시 내가 아내에게 요구했던 단 한 가지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고 싶다”였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우리는 고기국수와 돼지갈비와 근고기 등등을 참 많이도 먹었다. 

그래서 첫 여행 이후 제주는 “안락하고 기름진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별 준비 없이 가도 아내가 다 알아서 해주시는 곳이라, 세상에서 가장 편한 여행지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 거기 참 좋았지!”라며 장소를 떠올리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곳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찾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여행이 아니라 관광을 다녔던 셈이다. 


'여행은 꽃보다 떡'이라는 격언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 내게 아내는 “제주에 혼자 다녀오는 건 어때?”라는 제안을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대략 석 달 전이었고 아내는 서울로의 장기출장을 앞두고 있었다. 나 혼자 집을 보고 있느니 제주도라도 다녀오라는 배려였다. “마지막이 될 테니까. 혼자 떠나는 건”이라고 말하며 내 등을 토닥였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였던가. 



그렇게 덩그러니 혼자 도착한 2월의 제주는, 바람이 심했다. 12월에도 갔던 곳이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2월의 바람이 더 심했다. 어쨌거나 렌트카를 인수해서 우선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오른편으로부터 파도가 치는 게 보였다. 심한 바람이 만들어낸 심한 파도들은, 이상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부터 느릿느릿 밀려와 검은 현무암에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듯이 부딪혔다. 슬로우 모션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앞뒤로 차가 없던 오후 다섯 시 무렵의 해안도로를, 나는 바다의 속도에 맞춰 좀 천천히 달렸다. 

파도가 부서지는 곳과 거리가 좀 있었지만, 포말은 내가 운전하는 차의 앞유리창에까지 날아왔다. 그 모습을 보며, 배에 내 차를 싣고 입도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게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차가 바닷물에 젖어 녹이라도 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손 쓸 방법이 없어지니까.

어떤 기계든 물이 닿아 좋을 것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소금이 녹아 있는 바닷물이 닿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하지만, 난 차를 세울 수 있는 곳에 잠시 주차를 하고 카메라를 들고 내렸다. 차야 어차피 렌트한 거고, 카메라는 외투 속에 숨기고 있다 포말이 지나간 후 꺼내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박력은 제주만의 것이었다.


바람은 소리로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이리저리 휘몰아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불어오는 게 고마울 정도로 강했다. 바람막이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 채 카메라를 품에 품고 바람을 맞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재미있어졌다. 이게 제주의 진짜 모습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혼자 있으니 이런 짓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기분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평소 느긋한 성격의 아내였기에 내가 잠시 멈춰 바람에 맞서 버티고 서 있는다 해도, 그걸 갖고 타박하거나 재촉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 안에 앉아서, 시커먼 바람막이로 몸을 가린 채 바람에 시비를 걸고 있는 남편을 보는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혼자 다니면 좋구나, 라고 중얼거리고 싶었지만 입은 잘 떨어지질 않았다. 얼른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시 차에 올랐다.    


아래의 웅덩이 같은 곳은 구엄돌 염전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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