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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Mar 23. 2021

나는 어른이 되었는가_(4)

딱히 원한 건 아니었지만

얼마 전, 인터뷰를 진행하며 노트북 키보드를 타이핑하던 내 손에 눈이 갔다. 인터뷰 현장의 통유리를 통해 들어선 햇볕이 하필 손등을 환하게 비추었던 탓인데, 덕분에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주름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의 주름 뿐 아니라 손등 역시 자잘한 주름들이 부쩍 늘어난 게 한눈에 들어와 박혔다. 아니, 그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으니 ‘늘어났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건 그냥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 오래 전부터 존재했는데 내가 인식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내가 요즘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진짜 노동은 인터뷰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인터뷰이를 앞에 두고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나는 아주 잠깐 내 늙어버린 손에 대해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늙은 손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대부분은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지만, 때때로 듣고 글로 옮기기에 쉽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몇 줄의 문장으로 표현하기엔 너무 무겁고 슬펐기 때문이었다. 그런 감정은 특히 결혼한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쩍 자주 마주치게 됐다. 내게 주어지는 일에 변화가 있기도 했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삶에 변화가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약 15년 전, 휴먼 다큐멘터리 제작팀을 취재할 일이 있었다. “이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자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잠깐 고개를 갸웃한 담당 작가가 내게 답했다.     


“딱히 필요한 자격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자기 가족은 있어야 해요. 아이가 포함된 나의 가족.”     


그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은 대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가족 구성원 각자의 입장과 형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들었던 그 대답은, 아이를 키우는 요즘 더욱 자주 떠오르곤 한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유독 더 몰입되는 경험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나의 가족이 있으니까.     


그 대상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공감이나 이해와 같은 높은 수준의 작용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림짐작이 되는 경우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실수 같은 것에 대해서도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라는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딱히 원한 건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난 여전히 잘못한 누군가를 냉철하게 비판하기 위해 그의 과거를 낱낱이 확인하느라 바빴을 텐데,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가 이렇게 당신을 평가했노라 준엄하게 꾸짖었을 텐데. 난 이제 그 정도로 열정적이지 않기에, 그 정도로 신랄하지 않기에 그저 짧은 한숨을 쉬거나 속으로 혀를 차는 정도로 표현을 갈음할 따름이다.      


“꽃보다 청춘”에서 윤상, 유희열과 함께 남미를 여행하던 이적의 인터뷰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팬들은 예전처럼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음악을 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때의 이적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많은 게 변했기 때문에. 시간은, 그리고 나이는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날의 인터뷰는 무사히 끝났다. 내가 딴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손은 제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터뷰이가 “얼마 전 인터뷰는 잔뜩 긴장해서 힘들었는데, 이번엔 굉장히 재미있었다”며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록 그것이 그저 접대성 멘트라 해도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 일은 손이 다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염치없음 역시, 내 변화의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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