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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Mar 20. 2021

나는 어른이 되었는가_(3)

- 그저 이 정도를 바랄 뿐

나이를 먹으며 잃게 된 것은, 인화성과 휘발성이다. 20대까지의 나는, 내 주위 모든 것을 발화요인으로 삼았다. 보이고 들리고 닿는 모든 것으로 인해 나는 타올랐다. 그래서 무엇에든 뜨거울 수 있었다. 10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 열기는 30대 초반까지 유지됐던 걸로 기억한다. 누구도 부럽지 않게 즐거웠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분노하던 때였다. 취급에 주의를 요하는 위험물 같은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겠지만.     


자우림 정도의 템포와 비트라면 그저 '흥겨울 정도'일 때도 있었다.


지금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그다지 뜨겁지도, 그렇다고 해서 차갑지도 않은 무언가다. 그렇다 해서 이 상태가 불변인 것은 아니다.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호기심이 생기고 내 기준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기분이 상한다. 감정은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화학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된 상태다. 재미가 없어졌다.      


통영 바다에는 격렬한 파도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기엔 심심하다. 나처럼.


다시 불을 붙이려는 시도, 재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당연히 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내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는 여행을 통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막상 떠나보면 언젠가 한 번 가본 곳이거나, 그곳과 비슷한 곳이거나, 내 취향에 안 맞는 곳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은, 전에 없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사람은 업무적으로 많이 만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가질 않는다. 물론 내가 집중해야 할 부분 역시 그 사람 자체가 아닌 그들이 해온 일에 대한 것이지만, “대단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사람에 대한 궁금증 역시 많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 이미 경험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 또 하나, 마음이 몸을 배려하기 시작했기 때문. 나의 호기심들은 이제 “다음”을 생각한다. 흥미로운 무언가에 다가서기 전이면 그 정도까지 가까워져도 몸이 괜찮을까,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숙주를 죽이지 않는 기생충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의 정신이라는 게 과연 고결하긴 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정신력의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던가. 몸은 결국 하고자 하는 정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법이라는 그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것은 그저 ‘체력은 국력’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호가 아니었을까?      


더 높은 강도를 견딜 수 있는 노동력을 갈구하던 사회에서 병약함은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경지를 뛰어넘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흔하다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우리의 사표師表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지금의 내 몸이, 남아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건강하고 활기찬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전보다는 유지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유지조차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아득함을. 어쩌면 이게 내 불안감의 가장 아래쪽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더 나아질 확률은 낮다.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이것이 40대 이후의, 흔히 말하는 어른이 자기자신에 대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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