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이 정도를 바랄 뿐
나이를 먹으며 잃게 된 것은, 인화성과 휘발성이다. 20대까지의 나는, 내 주위 모든 것을 발화요인으로 삼았다. 보이고 들리고 닿는 모든 것으로 인해 나는 타올랐다. 그래서 무엇에든 뜨거울 수 있었다. 10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 열기는 30대 초반까지 유지됐던 걸로 기억한다. 누구도 부럽지 않게 즐거웠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분노하던 때였다. 취급에 주의를 요하는 위험물 같은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겠지만.
지금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그다지 뜨겁지도, 그렇다고 해서 차갑지도 않은 무언가다. 그렇다 해서 이 상태가 불변인 것은 아니다.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호기심이 생기고 내 기준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기분이 상한다. 감정은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화학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된 상태다. 재미가 없어졌다.
다시 불을 붙이려는 시도, 재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당연히 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내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는 여행을 통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막상 떠나보면 언젠가 한 번 가본 곳이거나, 그곳과 비슷한 곳이거나, 내 취향에 안 맞는 곳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은, 전에 없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사람은 업무적으로 많이 만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가질 않는다. 물론 내가 집중해야 할 부분 역시 그 사람 자체가 아닌 그들이 해온 일에 대한 것이지만, “대단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사람에 대한 궁금증 역시 많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 이미 경험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 또 하나, 마음이 몸을 배려하기 시작했기 때문. 나의 호기심들은 이제 “다음”을 생각한다. 흥미로운 무언가에 다가서기 전이면 그 정도까지 가까워져도 몸이 괜찮을까,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숙주를 죽이지 않는 기생충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의 정신이라는 게 과연 고결하긴 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정신력의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던가. 몸은 결국 하고자 하는 정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법이라는 그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것은 그저 ‘체력은 국력’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호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런 경지를 뛰어넘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흔하다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우리의 사표師表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지금의 내 몸이, 남아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건강하고 활기찬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전보다는 유지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유지조차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아득함을. 어쩌면 이게 내 불안감의 가장 아래쪽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것이 40대 이후의, 흔히 말하는 어른이 자기자신에 대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