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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Jul 01. 2022

대의를 위한 보틀

두 병의 위스키와 한 병의 와인



이번 달 초, 역류성후두염 진단을 받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던 터라 꽤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자극적인 음식, 탄산, 술을 멀리해야 한다는 게 그러했고.


하지만 나는 착한 환자니까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시는 술이 더 맛있으니까

꾹 참기로 했다.

그렇게 술 없는 나날을 한 달 정도 보내고 있던 오늘

부산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을 가다 보니 눈에 들어온 스타필드.

안에 트레이더스가 있으니 애들 먹일 과일을 사러 차를 돌렸다.

분명 전에 왔던 곳임에도 길을 잃어 헤매다 보니 와인앤모어 앞에 서게 됐다.


허허 이런 흉악한 곳이 있었다니...


어떤 술들이 또 누군가의 후두염을 유발할까 걱정이 돼 한 번 들어가 봤다.

그런데 문득, 지난 달엔가 일라이저 크레이그 라이가 

어떤 와인과 1+1으로 팔리고 있다는 소식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차피 마시지 못 하는 술이지만, 행사의 호응도는 어느 정도인가 호기심이 생겨

아직 해당 제품이 남아 있느냐 물었더니 구입이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온다.


이런 이런. 

이런 좋은 이벤트는 응당 품절로 대응해야 훗날 비슷한 행사를 기대할 수 있을 텐데...


해서 아직 두 달은 더 약을 먹어야 하지만

그래서 뚜껑도 못 여는 보틀이 될 게 틀림없지만

위스키 애호가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데에 일말의 밑거름이라도 되고자

카드를 뽑아 내밀었다.

본의 아니게 술을 사고 말았지만, 모두 대의를 위한 것이니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카톡이 와서 확인을 해보니

주문했던 술이 예약한 점포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아 그 사특한 이벤트 말이군!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세간의 화제인 글렌알라키 CS 10년 배치7에 대해

무료 증정도 아니고, 

무려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걸고 이벤트를 벌이기에

참으로 가당찮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응모를 했더니 

당첨이 됐다고 연락이 왔던 게 지난 주 금요일이던가.


그 연락을 받고 문득 고민이 됐다.

한반도 끝자락에 있는 이곳에서도 오픈런 대상인 보틀을 구입하는 게

수도권 과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시대에

지방균형발전을 위한 작은 시금석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해서 이 역시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결제를 했고

마침 오늘 수령을 하게 되어

졸지에 오늘 하루 세 개의 보틀을 들이게 됐다. 


갖가지 과일과 채소, 연어 등과 함께

저 보틀들을 들고 들어와서 마눌님께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려 했지만

"내가 언제 당신 술 사는 거 갖고 뭐라 그랬어?"라며

선선한 반응을 보여주시는 마눌님.



대의를 도모하다 본의 아니게 생기는 부산물들에 

이토록 관대한 대인의 아량을 베풀어주시는 마눌님께

그저 감읍하고 감읍할 따름. 


얼른 후두염을 고치고 뚜따할 날을 기다리는 장마 중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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