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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Sep 30. 2023

제9차 제주 가족여행

제주의 겨울은 얼마나 황량한가. 불어오는 방향을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에 떠밀려 그 어느 때보다 크고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는 검푸른 파도는 얼마나 매몰찬가. 검게 빛나는 현무암에 분말처럼 흩날리는 파도는 시공을 넘어선 아득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기에 제주의 겨울 바다는 너무나 낭만적이다. 파도가 없는, 그래서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한 통영 바다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기에 더욱 극적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우리 가족 중 오직 나 하나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겨울 제주 여행을 나 혼자만 좋아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를 제외한 모두가 겨울 제주 여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아내는 제주에서 생활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 이외의 계절도 얼마나 좋은지 여러 번 설명을 했지만, 우리의 제주 여행은 대부분 겨울에만 이루어졌다. 비단 내 취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붐비는 걸 피하자는 의도가 무엇보다 컸다. 특히 바닷가 도시들은 5월부터 관광객으로 붐비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통영에 살기 시작하면서 매년 새롭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주의 한 호텔을 평소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예약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럴 때는 앞뒤 보지 않고 예약부터 하는 게 순서. 그렇지 않으면 고용 안정성은 고사하고, 출장 중 사고 시에도 산재 판정은 꿈도 꾸지 못 하는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보람을 느낄 기회가 현격히 감소하기 때문이다. 시기는 5월 31일부터 4박 5일. 재택 근무 중이던 아내에게도 적당한 일정이었다. 이제 초등 1, 3학년이 된 아이들은 개근상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도 않으니 일주일 정도 체험학습을 떠나도 문제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그때의 난, 제주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된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걷는 거리가 길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여전히 마음에 차는 정도는 아니다. 동네 친구의 친구가 봤다는 개천 다리 밑 해골을 찾기 위해 하루에 서너 시간은 길바닥 위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나 때”에 비하면, 우리 집 초등학생들의 운동량과 지구력은 여전히 80년대 유치원생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의 향상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이번엔 좀 더 많이 걷는 쪽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사려니숲길을 첫 행선지로 정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제주에는 걷기 좋은 길이 부지기수. 쉬지 않고 백록담까지 이어지는 오르막부터 단정하고 친절한 데크로 이루어진 탐방로까지 종류도 많다. 그리고 사려니숲길은, 중산간의 가장 깊은 풍경을 가장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 날이 흐린 날은 흐려서, 맑은 날은 맑아서 좋은 공간이라 날씨에 따른 계획 유동성도 적다. 운이 좋으면 노루와의 조우도 기대할 수 있지만, 그건 새벽같이 숲에 들어서는 부지런한 여행객들에게만 허락된 행운.   

  

아이들은 숲을 좋아했다. 다만 신기해하지는 않았다.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 통영에도 있을뿐더러, 어린이집 시절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숲 활동을 해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의 걸음은 오히려 탑동 방파제 산책로에서 더욱 활기찼다. 물론 방파제를 따라 걷는 경험 역시 통영에서도 언제든 가능했지만, 노을이 지는 바다 위로 비행기들이 날아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탑동 해변만의 정취였다.      


이제 계획의 50% 이상을 실행할 수 있는 여행이 가능해졌지만, 모든 순간이 목가적 풍경으로만 가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일정은, 좀 더 까끌까끌했다. 이제 막 6월에 접어들어 얼렁뚱땅 물에 몸을 담그기 좋은 계절이 된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한적한 바다를 찾아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김녕의 세기알해변. 그런데, 도착해 보니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도, 나는 기시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아, 거기였구나.     


1년 전, 제주에 동행한 클라이언트들과 함께 잠시 차를 멈추고 커피를 마셨던 곳이었다. 그때는 똑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다음 날 촬영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동선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반 년 동안 제주를 열 번은 오갔다. 그때만 해도, 같은 장소에 서서 아이들이 첨벙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게 될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당시 내 출장 목적지의 대부분은, 다른 이들이 보기엔 생경한 곳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혼자였다면 혹은 여행 삼아 왔다면 경험하지 못할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올리브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돌담길부터 서귀포 앞에 우주선 발사대를 계획하고 있는 우주 지상국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장면들을 제주에서 마주쳤다. 내가 제주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반 년 동안의 경험 덕분이었다.    

  

다만 그때의 경험들이 여행에 유용하게 사용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오래 걸을 수 있어야 했다. 걷는 건 여행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 그런데 우리집 초등학생들은 아직 두 시간 이상을 걷지 못 한다. 물론 좋아하거나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했을 때는 체력을 생각하지 않고 걷거나 뛰지만, 그 후유증이 상당하기 때문에 다음 일정에 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그때가 와도 여전히 엄마와 아빠를 따라 여행을 다닐지 문득 아득해졌다. 아빠가 경험한 여행의 기술이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할지 문득 걱정도 됐다. 물론 100명의 사람에게는 100개의 여행이 있듯 아이들은 아이들의 여행을 만들어가겠지만, 그래도 하나쯤 접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생겼다. 가족으로서의 유대도 좋지만, 하나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는 여행자로서의 느슨한 우정을 만들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망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분명 “발만 담그고 놀겠다”고 했지만 결국 온통 바닷물에 흠뻑 젖어버린 아이들, 정확히 말하자면 하반신이 모래 범벅이 된 작은 녀석의 뒷수습을 해야만 했으니까. 물론 예상치 못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팬티에 모래가 한가득 담겨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에 왔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트라우마가 밀려왔다.      


한여름이었다면, 그래서 해수욕장들이 정식 개장을 한 상태라면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6월 초입. 두 어린이가 어기적거리며 점점 내게 가까이 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 상태로는 차에 태울 수가 없었다. 해수욕장 근처의 수돗물로 대충 수습을 해볼 요량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알량한 기대에 부응하는 물건은 보이질 않았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방문자센터를 발견한 건 아내였다. 마침 그곳에서는, 온수는 안 나오지만, 샤워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터라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마음씨 좋은 매니저 아주머니는, 펜션에서 사용하는 수건도 빌려주셨다. 물론 여기서 문제가 끝났다면 이곳에 후일담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의 여벌 옷을 준비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바닷물에 대한 욕구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탓이었다. 물론 렌트카가 준비돼 있긴 했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30분 거리 내내 아이들은 젖은 옷을 입고 입어야 했다. 아이에 따라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일 수도 있었다. 우리 초등학생들은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됐다. 큰 녀석은 전자, 작은 녀석은 후자.    

  

각자 견딜 수 있는 방법으로 숙소까지 돌아가기로 한 렌트카 안은, 뜨거웠다. 5월말부터 작열하기 시작한 제주의 햇살은, 실내를 금방 열기로 가득 채웠지만 에어컨을 틀거나 창문을 열 수는 없었다. 젖은 혹은 벗은 상태의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유난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가벼운 감기가 하룻밤 만에 폐렴으로 악화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던 부모라면 차라리 30분 동안의 이동식 사우나를 택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그런 상황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작은 녀석은 발가벗은 몸을 들키지 않기 위해 레그룸에 쪼그려 앉아 있었고, 큰 녀석은 그런 동생을 내려다 보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형이 웃는 모습을 보고 작은 녀석도 따라 웃었다. 덕분에, 달리는 찜통이 된 렌트카 안은 다른 소리 없이 오직 웃음만 가득했다. 덕분에 파도처럼 밀려오던 그 트라우마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앞으로의 여행이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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