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제주여행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갈 계획은 없었다. 여행은 자기 몸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영위하는 행위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유모차를 밀고 여행을 갔다. 아니, 사실은 출장 동행이었다. 엄마는 일하고 아빠와 아들은 제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 고단한 ‘신생아 육아’에서 막 벗어나려던 참이었기에 나와 아내는 섣부른 결정을 내리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내는 제주에 있는 한 IT 기업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고, 이제 막 중반을 넘어선 일들을 점검하기 위해 그곳의 담당자와 임원을 만나기로 했다. 일정은 3박 4일. 그중 이틀은 우리 식구끼리만 펜션에서 지내고, 나머지 하루는 이미 안면이 있는 촬영 스태프들과 같은 숙소를 사용하기로 했다. 제주의 IT 기업은, 고맙게도, 남편과 아들 등의 부속인원 동행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뜻을 전해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고 기대 반 걱정 반인 상태로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렌트카를 몰고 아내의 미팅 장소인 상대 회사로 향했다. 타고난 기질이 좀 예민하긴 해도 얌전한 편인 알밤이(큰 녀석 태명)는, 해당 기업의 담당자와 여성 임원 앞에서 생후 5개월 또래 중 최상위권의 의젓함을 선보이며 미팅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 보상으로 로비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서 꽤 비싼 다과를 즐길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고, 그런 아이의 아빠인 덕분에 내 카드로는 절대 결제하지 않았을 메뉴 몇 개를 맛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온전한 형태의 여행은 아니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 오전부터 아내는 업무를 위해 우리와 떨어졌다. 나와 알밤이는 낯선 곳에서 둘만 남게 되었다. 물론 계획이야 있었다.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제주 렛츠런 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하며 중간중간 간식을 먹이면 두어 시간은 쉽게 지나갈 것이었다. 운이 좋다면 한가롭게 노니는 말들과도 조우할 수 있을 터였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차로 돌아와 기저귀를 한 번 갈아주고 식당으로 가, 알밤이는 유축해놓은 모유를 뜨거운 물에 데워 먹이고, 나는 뭐든 빨리 나오는 거 하나 시켜서 먹으면 점심 시간도 끝. 오후엔 잠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재우고 다시 유모차를 밀고 나가서 바닷가를 돌아다니다 카페에서 쉬다 보면 아내가 일을 마칠 시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얼마나 가볍고 우스운 것이던가.
엄마와 떨어지면서부터 알밤이가 불안해 하는 게 느껴졌다. 렛츠런 파크에 도착해 유모차를 밀고 있는 동안에도 온몸을 버둥거리며 엄마의 존재를 찾기 위해 애쓰던 알밤이는, 입구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울음을 터뜨렸다. 어서 빨리 늘씬한 경주마들을 이용해 주의를 돌리고 싶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말이 아닌 무엇이라도 좀 신기한 게 눈에 들어오길 바랐지만, 평일 오전의 렛츠런파크 입구 근처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다 못해 잠자리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결국 예상보다 빨리 간식을 꺼내 들어야 했다. 간식답게, 효과는 대단했다. 하지만, 역시나 간식답게, 효과는 길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유모차를 밀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아이를 차에 태웠다. 하지만 갈 데가 마땅찮았다. 아이는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온몸으로 항의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아빠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곱씹을 수밖에 없다.
결국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우선 아이를 바닥에라도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아이를 울리는 아빠라는 사실을 불특정 다수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결국 그날은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기저귀를 갈고 마사지를 해주며 긴장을 낮춘 후 숙소 주변을 돌며 풀떼기나 뽑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럼에도 엄마를 향한 알밤이의 마음은 한결 같았지만, 어쨌든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때만 해도 여유가 있던 순간이었다. 진짜 문제는 이튿날 합류한 촬영팀과 같은 숙소를 사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다시 아침이 되고 아내는 일 때문에 먼저 숙소를 나섰다. 고작 하루 만에, 알밤이는 엄마가 없는 낮시간에 순응한 것처럼 보였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데에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아빠로서의 자존감이 한껏 높아졌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아이가 어른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면, 그 반대급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난 그 댓가를 몇 시간 후인 저녁에 치르게 되었다.
새롭게 옮긴 숙소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밤이가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숨소리도 어딘지 이상해졌다. 납작하고 넓은 코를 몇 번 짜보았더니 누런 콧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내는 촬영팀과 내일 진행할 촬영에 대해 협의를 해야 했다. 나는 잠시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얼른 제주 시내로 차를 몰았다. 다행스럽게도, 미리 파악해두었던 24시간 약국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서 콧물 흡입기, 코뻥을 처음 구입했다. 제주에서 구입한 것 중 가장 오래 사용한 기념품과의 첫 만남이었다.
코뻥, 뻥코라고도 불리는 이 기념품 아니 콧물 흡입기의 동작 원리는 간단하다. 막힌 콧구멍에 노즐을 갖다 대고 힘껏 공기를 빨아들임으로써 콧물을 뽑아내는 도구. 단순명료한 구조의 이 기구는 무척이나 단도직입적이라, 처음 접하는 아이들로 하여금 생래적 거부감을 일깨우는 데에 더 없이 큰 효과를 자랑한다. 알밤이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니 믿어도 좋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 코뻥을 입에 문 나와 아빠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알밤이는 눈물과 콧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론 회의 중 몇 번이나 방을 들여다봐야 했던, 힘들게 잠을 재운 이후에도 몇 번이나 깨서 아이를 돌봐야 했던 아내의 고단함보다야 덜했겠지만 나 역시 경험해 보지 못한 피곤함에 온몸이 잠식당했다.
숱한 여행길에 만났던 어떤 상황보다 막막했으며, 그래서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는 생각에 휩싸여 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어떤 생산적 목적도 갖고 있지 않던 나와 알밤이에게 그때 제주에서 보낸 시간은, 분명 여행이었다. 우리 가족의,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알밤이의 첫 가족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