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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Sep 30. 2023

사실 아빠는 축구 별로 안 좋아해_(2)

제1차 축구관람여행

축구. 전 세계를 지배하는 스포츠. 인류가 만들어낸 것 중 이것만큼 많은 이들을 매료시킨 건 없었다. 그리고 10살, 8살이 된 우리집 초등학생들도 축구라는 무한한 바다 속으로 빠르게 침잠해갔다. 그래서 결국은 운동화 대신 풋살화를 신고 등교하고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엄마 아빠의 도움 없이도 새벽같이 일어나 TV를 켜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주말이면 아빠와 함께 집에서 5분 거리 인조잔디 구장에 가서 두 시간 남짓 공을 차고 돌아와 저녁에는 축구 관련 예능을 보는 것으로 일주일을 마무리했다. 당연히 학교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축구를 하느라 땀이 마를 새가 없었고.     


녀석들이 그렇게 축구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고 팀 순위를 찾아보고 하이라이트를 뒤적이는 모습은, 종목만 다를 뿐 나 역시 경험했던 것들. 그래서 내게 축구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아이들의 진지한 얼굴을 볼 때면 괜히 웃음이 났다. 물론 그 대상이 야구였다면 아빠로서가 아닌 오랜 경력의 야구팬으로 해줄 이야기가 더 많았겠지만, 어쨌든 스포츠팬으로서의 유대를 느낄 수 있었기에 기분은 좋았다.     

 

다만 이는,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두꺼운 룰북(Rule Book)을 가진 스포츠”를 좋아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즉, 야구 규칙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축구 정도의 간단한 스포츠는 평소의 상식으로도 답을 해줄 수 있다는 의미. 내가 만약 축구팬이고 아이들이 야구에 관심을 가져 “아빠 근데, 스크라이크아웃 낫아웃은 왜 있는 거야?”라거나 “정상 투구랑 보크는 어떻게 달라?”라거나 “야수선택은 왜 안타가 아니야?” 등의 질문을 한다면 쉽게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야구팬인 아빠를 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이만큼의 행운으로 생색을 낼 만큼 배포가 작은 아빠는 아니다. 아빠가 야구를 좋아함에도, 스포츠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큰 결단이 필요했다. K리그1 직관이라면 내가 바라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건, 큰 녀석이 수의사 대신 축구와 관련된 일을 장래희망으로 삼을까 고민하는 모습을 봤을 무렵이었다.      


물론 그 또래 아이들의 꿈이라는 게 대부분 조석변개인 경우가 많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유지해 온 수의사라는 꿈이 축구에 의해 변했다는 게 내게는 꽤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물론 선수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의 운동신경이 없다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선수가 아니라도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라면 이 녀석의 열정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축구가 어떤 곳에서 어떤 분위기로 진행되는지 직접 경험시켜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아아 이 역시 야구팬의 대담한 결정.     


우선 통영에서 출발해 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경기가 ‘직관’ 대상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운영되고 있는 프로축구팀은 경남FC지만, 소속돼 있는 곳은 K리그2. 쉽게 말해 2부 리그에 속해 있다. 물론 2부 리그를 폄하하고 싶은 맘은 없지만, 첫 프로경기 직관 은 좀 더 뜨거운 열기와 숨 막힐 듯한 박진감 속과 함께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좀 더 검색을 해보니 대구FC의 홈경기 분위기가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기장이 도심에 위치하고 있어 경기 후 식당과 숙소로의 이동에도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 점도 좋았다. 대전, 포항, 전주, 울산 등의 경쟁지를 제치고 대구가 첫 번째 직관 목적지로 결정됐다.     


숙소는 대구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골랐는데, 의외로 3인 이상 숙박이 가능한 괜찮은 호텔이 대구 중심지에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호텔로 이동하는 경로상에 “언젠가는 애들이랑 같이 가야지”라 생각했던 중식집이 있어 거리 때문에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고민이 되는 지점은, 예매한 경기에 대한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홈팀이 이기는 장면을 보는 게 좋다. 그 과정이 극적이면 더더욱 좋다. 경기에 몰입하고 그 결과에 열광하는 경험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만한 일이기에, 직관하는 경기의 내용은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그런 경험이 항상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기적 같은 순간 때문에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주위에 한화팬이나 롯데팬에게 “혹시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어?”라고 물어보자. 은은한 미소로 시작된 회상이, 심한 경우, 인생에 대한 저주로 마무리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내일은 언제나 가장 사치스러운 존재. 중요한 건 당장 오늘의 승리다. 나와 아이들도 오늘 우리가 응원하는 대구FC의 승리만을 바라며 통영에서 출발했다. 아내는, 삼부자의 제주 여행 이후 약 6년 만에 혼자 집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게 됐고 우리는 그때 이후 처음으로 아빠와 아들들만의 조합으로 길을 떠났다. 그때보다는 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더 성숙해졌기에 더 큰 즐거움을 느낄 거라는 기대를 갖고.      


내 계획은 이러했다. 통영에서 대구FC의 홈구장인 DGB파크까지는 대략 2시간 30분. 경기는 오후 4시 30분 시작. 첫 경기장 경험인 만큼 조금 일찍 도착해 한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면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마산쯤에서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경기가 끝나고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가면 오후 6시 30분쯤이 될 테고,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면 밤 9시 무렵이 될 거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문제는 주차였다. DGB파크에 주차하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번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이상 대안을 찾아야 했다. 가장 많이 추천받는 방법은 길 건너에 있는 이마트 혹은 북구청 주차장을 이용하는 방법. 다만 북구청은 이마트에 비해 좀 더 멀었고 이마트는 5만 원 이상 구매를 해야 3시간 무료 주차가 가능했다. 여기에 내가 갖고 있는 무료주차권을 붙이면 주차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만 하룻밤을 자고 올 대구에서 일부러 사 올 5만 원 이상의 상품들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위스키를 한 병 사기로 했다. 이미 있는 술부터 마시자는 계획을 세운 참이었지만, 아이들에게 좀 더 안락한 관람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음을 아내에게 설명하기도 전에, 나는 허락을 득하였다. 덕분에 나는 의무적으로 술을 사야 하는 불행한 남자가 됐지만, 어쩌겠는가. 이 역시 쉽지 않은 아빠 노릇 중 하나인 것을.      


두 번째 주차 고민은 중식당에서였다. 아마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중식당일 게 틀림없는 이곳은, 주말이기에 평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곳의 주차장은 고작 열서너 대가 들어가면 그것으로 만차. 그나마 몇 년 전 직접 부지를 매입해 주차장을 마련했으니 그 정도로라도 수용을 하는 것이지, 예전엔 차를 다른 곳에 대고 택시를 타고 다녀올까 생각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 부분은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마트 주차장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예상과 같이 진행됐다. 호두가 쉼 없이 까불대는 모습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기에, 그럭저럭 참을만 했다. 제주에서처럼 달리는 차 안에서 토를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성장인가. 다만 이제는 큰 녀석이 동생의 장난을 조금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대구에 무사히 도착했다. 물론 위스키도 무사히 구매했고, 경기장에서 먹을 아이들의 주전부리도 하나씩 챙겼다.     

 

바깥으로 나서자 대구FC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경기장의 지붕을 가리키며 신이 났다. 통영보다 훨씬 더운 날이었지만, 아이들은 내색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장 입성. 아담하지만 작지 않은, 열기가 느껴지지만 무덥지 않은 대구FC의 홈구장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날씨가 좋았다. 덕분에 새하얀 흰구름과 새파란 하늘 아래서 초록색 잔디는 유독 반짝여 보였다. 그 위에서 식전 행사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관중석은 아직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신기해 보였다. 미리 유튜브 등을 통해 예습을 했던 큰 녀석도 “실제로 와 보니까 더 좋다”며 내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 인생에 축구가 등장하게 될줄이야.


한 시간 남짓 후 시작된 경기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전반은 0:0으로 끝났지만, 후반 시작과 함께 대구FC가 선취골을 넣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원FC가 만회골을 넣었다. 그대로 무승부 경기가 되나 싶던 89분경, 대구FC의 주장인 세징야가 극적인 다이빙 헤더로 승패를 결정했으며, 이어지는 추가 시간에서 쐐기골이 터지며 대구FC는 3:1 승리를 거뒀다. 야구팬인 나 역시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장면들로 가득 찬 경기였다.     


당연히 서포터들은 난리가 났고, 서포터석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우리는 그 열광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만끽할 수 있었다. 처음엔 서포터들의 응원을 따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아이들이, 결승골이 터졌을 때부터는 크게 소리 지르며 박수치는 데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직관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팀과 관중의 일원으로써 함께 환호하고 아쉬워하며 휘발성이 강한 커다란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은,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대구FC 선수단의 관중 인사가 끝날 때까지 박수를 멈추지 않았던 아이들과 경기장 밖으로 나서자,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뜨겁던 대구의 태양은 주황색으로 빛나며 긴 땅거미를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골이 들어가던 장면을 재연하며 신이 나 떠들며 내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 모든 조합들 한가운데서, 땀 흘린 초여름 저녁에만 만끽할 수 있는 신선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서울을 떠난 이후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기분이 말이다.     


일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잊고 살았던 야구 그리고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야구를 좋아했구나, 라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했다. 아이들의 직관을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오히려 내가 축구 덕분에 다시 승부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일상을 위한 에너지를 만나게 됐다. 그래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약 15년 만에 다시 만난 스포츠의 순수한 즐거움 속에 아이들과 함께 깊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야구장에서라면 이런 즐거움이 곱절을 넘어 제곱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식당으로 길을 잡았다. 대구의 여름처럼 뜨거운 스포츠팬 삼부자의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된 순간이었다. 


승리의 기쁨은 화끈한 식사로 마무리하는 게 스포츠팬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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