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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Sep 30. 2023

사실 아빠는 축구 별로 안 좋아해_(1)

제1차 축구관람여행

물론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표현”이라 지적당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스포츠를 직접 경험하거나 관전하는 데에 있어서 아빠의 역할은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래도 스포츠에 열광하는 쪽은 남성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다양한 스포츠에 관심을 가져왔던 평범한 남성 중 한 명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야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오비 베어스의 유니폼이 유독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껑충한 키의 1루수 신경식 선수가 입은 오비 베어스의 유니폼이 가장 멋있어 보였다. 난 그렇게 오비 베어스 팬이 됐고, 중학생이 되자 혼자 잠실야구장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등학생이 되자, 어쩐 일인지 독서실이나 학원으로 가던 중 길을 잃고 잠실야구장에서 내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려 표를 끊고 바깥으로 나서면, 볼 때마다 낯선 풍경인 커다란 야구장 앞에 서게 된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기인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 응원석 안에서 안정을 찾곤 했다.      


대학생이 되자 내 야구장 출입은 일종의 귀소본능과 같은 패턴을 갖게 됐다. 한창 대학생활과 술을 알아가던 때였음에도, 5회말이 진행될 무렵이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처음엔 나를 다시 잡아 앉히려던 친구들도 한 학기가 지나자 야구장으로 향하는 나를 배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그런 친구들을 위해 나 역시 성의를 보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자정 무렵까지 마실 술을 두어 시간 동안 압축해 마시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진심과 진심이 만나 배려를 꽃피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다만 지하철 안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술기운에 푹푹 주저앉는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야구장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지 알 수 없는 관중 중 한 명으로 묻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야구장을 집처럼 들락거리다 보니 자연스레 구단 직원들과도 안면을 트게 됐고, 내 전공을 알게 된 직원 중 한 명이 “PC통신에 모인 팬들을 대표해 선수들과 인터뷰를 해 기사를 써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알코올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은 진심이 또 하나의 꽃을 피워낸 순간이었다.     


그 후부터 2년 동안 나는 입장권을 사지 않고도 야구장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선수들과 얼마 동안은 사적인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스포츠신문 기자들과도 가끔 식사를 하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야구에 관한한 여한이 없는 시기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이와 캐치볼을 하기 위해서라도 결혼을 하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야구 열기 속에서 성장한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캐치볼은 단순하면서도 더 없이 매력적인 놀이였다. 그저 공을 주고받을 뿐이지만, 상대를 향해 공을 던질 때마다 허공에 만들어지는 궤적 없는 포물선은 이상하게 낭만적이었다. 그래서 가끔 공이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도 서로 낄낄거리며 그것을 줍기 위해 달려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미국 영화에서, 과묵한 아버지와 사춘기 아들 사이의 덤덤하지만 속 깊은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캐치볼 장면을 삽입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 도착한 야구장에서 선수들이 워밍업을 위해 길게 캐치볼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아이가 커가면서 부모와의, 특히 아버지와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도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다 보면 대화를 나눌 일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담은 공을 던지고, 그것을 받아줄 수 있는 관계만 유지된다면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기에 내 아이가 있고, 여기에 내가 있을 테니까.      


결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내가 아이와의 캐치볼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감상적으로 그려보는 일은 꽤 우스웠다. 하지만 “내 인생에 야구장이라는 게 등장할 줄은 몰랐네요”라는 말로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로 나선 소감을 밝히던 당시 여자친구이자 현재 아내와의 야구 관람이 시작되자, 그 우스꽝스러운 상상의 현실화 가능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야구장을 가보지 못 했다.


아내는 “야구는 별로지만 야구장에서의 맥주는 좋다”며 함께 야구장에 가는 일에 큰 거부감을 보이질 않았다. 하필이면 잠실야구장이 아내의 인생에 첫 등장한 날, 두산과 삼성이 5시간 23분에 달하는 역대 13번째 최장 경기라는 강력한 백신을 투여해준 덕분에 어지간한 경기는 쉽게 이해가능한 수준이 된 것이리라. 덕분에 결혼 후에도 내 야구 인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째 알밤이가 첫돌을 맞이했을 때, 아내는 돌잡이용 쿠키를 주문했다. 책과 지폐, 청진기 등 일반적인 돌잡이 아이템 외에도 너른 시야를 갖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지구 모양 쿠키와 “야구를 좋아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아빠의 진심이 담긴 야구공 모양 쿠키들이었다. 물론 이 돌잡이들은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을 모신 1부 돌잔치용은 아니었다.     

 

전문 사회자나 메이크업, 예복 등은 없었지만 평가가 좋은 중식당에서 나름대로의 격식을 차려 진행된 어른들과의 1부 돌잔치 이후, 우리는 예약해놓은 북촌의 독채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나와 아내의 친구들만 참석하는 2부 돌잔치가 진행됐는데, 1박 2일 동안 진행되는 행사(!)였던 터라 따로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 편한 시간에 오면 미리 준비해놓은 유기농 도시락과 인근에서 공수해 온 포장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마루에 앉아 차나 음료, 맥주를 마시며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됐다. 그럼 엄마 아빠와 동행한 아이들은 마당에서 저희들끼리 뛰어놀곤 했다.     


아직 젖먹이들과 함께한 친구들을 위해서는 수유방과 수면방도 준비해두었다. 방은 여러 개가 있으니 원한다면 하룻밤을 자고 갈 수도 있었고, 그래서 아내의 친구 부부와 아이가 우리와 함께 모처럼 즐거운 밤을 보내기로 했다. 마치 오랜만에 치르는 MT와 같은 분위기 속에 2부 돌잔치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아내가 돌케이크와 돌잡이를 내놓았다. 그리고 돌잡이의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다 마침내 야구공 모양의 돌잡이를 집어 들자 마당 안은 온통 웃음으로 가득 찼다.      


“아이고, 아빠가 저런 걸 주문했나 보네” 

“아무리 그래도 돌잡이까지 야구랑 연관시키는 건 좀 심하지 않냐” 

“지극정성이다 정말”      


누구도 일말의 의심을 갖지 않고 모든 초점을 내게 맞췄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 후 알밤이가 마침내 야구공 모양 쿠키를 집어들었을 때, 모두가 “아악!” 소리를 질렀고 나 혼자 기분이 좋아져 크게 웃었다. 내 친구들은 “너 축하해줘도 제수씨한데 혼 안 나는 거야?”라고 귓속말로 물었지만, 나는 담대한 심정이 돼 껄걸 웃으며 “그럼 그럼!”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난 알밤이가 어서 어엿한 두산팬이자 야구팬으로 성장해 캐치볼을 할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알밤아, 너의 운명은 야구란다.


하지만 인구 13만 내외의 통영은, 프로 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환경. 그나마 겨울이면 전지훈련을 온 몇몇 프로구단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거나 대학축구 춘계리그 등을 관전할 수 있지만, 내게는 큰 흥미를 끄는 이벤트들은 아니었다. 아니, 20대 같았다면 동계훈련도 직관할 정도의 열의가 있었겠지만 알밤이를 키우며 1년 동안은 아예 야구를 볼 수 없는 생활을 경험한 후 야구에 대한 관심이 확연히 줄어든 탓이었다.      


그럼에도 아이와 직접 공을 던질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종목을 통해 아이와 교감을 나누는 일은, 아마 모든 부모가 꿈꾸는 모습일 테니까. 그런데 이 녀석, 조짐이 좀 이상했다. 자꾸 큰 공이 좋다는 거였다. 그래. 아직은 그 작은 손으로, 짧은 팔로, 여물지 못한 어깨로, 아장거리는 하체로 공을 멀리 던지는 건 무리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큰 녀석과 작은 고무 축구공을 차며 놀기를 여러 날이 지나던 어느 날, 둘째가 태어났다.      


큰 녀석보다는 운동 신경이 좋고 더 활발한 호두는, 움직이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고 무엇이든 던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혼나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나는 은근한 기대를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던지는 거야. 다만 디딤발은 좀 더 던지는 방향으로 확실하게, 허리를 더 숙이고, 공을 놓는 포인트는 좀 더 일정하게. 이제 유아기를 지나 세 살이 된 녀석에게 이 정도는 바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녀석도 결국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발로 찰 수 있는 공이었다.      


취향과 기호를 억지로 고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는 곧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이 원할 때마다 발로 차는 공놀이를 했다. 가끔 테니스공과 플라스틱 찍찍이 글러브를 이용한 캐치볼을 아이들이 먼저 원할 때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열심이었지만 그런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자, 아이들은 본격적으로 축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이 생기질 않았다.      


어느 순간, 야구는 내게서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는 존재가 됐다. 두산의 승패에 대해서도 큰 감흥이 생기질 않았다. 야구장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며, 집중해서 중계를 보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다. 사실 야구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일에 심드렁해진 상태였다. 내 안에 열정이라는 게 있을까 싶은 의문이 자주 생기곤 했다. 아내는 가끔 “괜찮으니 서울 가서 야구 보고 와”라고 등을 떠밀기도 했지만, 귀찮았다. 이게 중년이 되는 신호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축구의 심연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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