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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Oct 14. 2023

그 여행작가는 여행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 아직까지는 엄마 혹은 아빠와 함께 어딘가를 가는 일에 대해 큰 거부감을 보이진 않는다. 다만 “과연 얼마나 이런 모습이 유지될까” 궁금해지는 순간이 잦아지고 있다. 맏이의 대학입시를 준비 중인 친구 하나는 엄숙한 얼굴로 “당장 다음 달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게 사춘기”라며 마음의 준비를 해놓으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어떨까. 아이들이 더 이상은 엄마 아빠와 여행을 가기 싫어하는 날이 온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 홀가분하면서도 조금은 서운할 게 틀림없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그런 순간을 위해 준비된 어휘라는 걸 절감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그런 감정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거라 확신한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 떠나곤 했던 내 여행을 미루어왔으니까.      


가고 싶었지만 아직 가지 못했던 곳들이 있다. 쿠바에서 한 달을 보낸다면, 낮에는 야구를 보고 저녁에는 럼을 베이스로 하는 많은 칵테일을 마시려 했다. 이후 멕시코로부터 시작하는 아메리카 대륙 여행 막바지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말벡 와인과 소고기로 이루어진 주지육림에 빠져 그동안의 고단함을 보상받을 계획이었다. 그러고 보니, 페루 리마의 스페니쉬 랭귀지 스쿨을 알아보기도 했었구나. 그때, 그러니까 결혼 전에는 남미 여행에 대한 계획을 이것저것 세우면서 북마크 폴더도 따로 만들어놨었지. 지금은 지워졌지만.    

 

다시 가고 싶은 유럽 이곳저곳도 있다. 스톡홀름에서 북쪽으로 1,500km를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아비스코 국립공원의 얼어붙은 호수를 걷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지난 겨울 북유럽 여행 때는 날씨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양조장 투어도 돌아야 하고, 부다페스트에서는 흔치 않은 한국식 열탕을 자랑하는 작은 동네 온천에서 몸을 덥힌 후 못 다 마신 토카이 와인으로 노곤한 몸을 달콤하게 절이고 싶기도 하다.      


아프리카는 또 어떤가. 잠비아에서 길이 갈려 닿을 수 없었던 나미비아의 붉은 사막과 로우랜드 고릴라를 근접해 관찰할 수 있는 우간다의 밀림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다. 무엇보다, 다시 한 번 잔지바르로 돌아가 비현실적으로 푸른 인도양을 바라보며 열대 과일들을 아무렇게나 갈아만든 쥬스를 마시며 아침을 먹고 싶다. 그때의 나는, 세상 둘도 없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육아를 부부 둘이서만 온전히 감당하다 보니, 호두가 다섯 살 무렵이 될 때까지는 내가 원했던 여행이 어떤 것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다녀온 여행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기만 했다. 그때가 너무나 그리웠으니까. 그리고 그 여행 속에서 자유롭던 내 모습은 적도 부근에서 봤던 햇살이 만들었던 것처럼 깊고 검은 그림자로 남아 있다. 내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림자만 남아 있는 것은.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단절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게 여행은 “거기에 있는 내 마음을 찾으러 가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이 먼저 가서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곤 했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이 아내에게 가 있었기에 그것의 행방을 찾기 위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내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찾을 여력이 없었다. 아내는 더했을 게 분명하다. 잉태와 함께 아이들은 엄마의 모든 것을 흡수하며 성장했으니까.      


그랬던 아이들이 곧 사춘기에 접어들 것이다. 미리 공부하기로는 “그동안 보호자가 쌓은 세계가 무너지고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시기”라는 사춘기에 접어들게 되면, 나와 아내 역시 또 다른 생활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이제 아이들을 저마다의 세상으로 보내고 우리는 옛날 기억들을 더듬으며 예전에 갖고 있던 꿈이나 계획들이 아직 유효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전히 진짜 여행을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그 행방을 알지 못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사춘기를 모두 보내고 난 뒤에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내 그림자 안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내 마음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걱정도 든다. 나는 아이들로부터 제대로 독립하게 될까. 아이들이 없는 일상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놓고 제 갈 길을 가듯, 나 역시 녀석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걸 그만두고 내가 가려던 길로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못 할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인류는 지금만큼 많은 인구를 유지하지 못 했을 테니까. 하지만, 다시 한 명의 여행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아이들이 내게 길을 묻는다면, 조금 더 자세한 안내와 조언을 건넬 수 있을 테니까. 아빠가 아닌, 그 길을 먼저 가봤던 선배의 입장에서.     


그러니, 다시 떠날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다시 여행자로 살아갈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 더 늦지도 더 빠르지도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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